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
이 선비는 글공부에만 매달리고 살림은 오로지 아내가 맡아서 꾸려 나갔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이들 부부는 훗날을 바라보며 가난의 어려움을 이겨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비가 밖에 나갔다 돌아와서 방문을 열자 아내가 무언가를 입에 넣으려다가 황급히 감추는 것을 목격했다.
선비는 아내가 자기도 모르게 음식을 감춰 두고 혼자 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고 감춘 것이 무엇이냐고 아내를 추궁했다.
당황한 아내는 호박씨가 하나 떨어져 있기에 그것이라도 까먹으려고 집어서 입에 넣다 보니까 빈 쭉정이더라고 실토했다.
아내는 눈물과 함께 용서를 구하고, 선비는 그런 아내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른바 ‘호박씨 깐다’는 말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 자체는 눈물겨운 내용을 담고 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야기의 내용과 거기에서 비롯된 말이 따로 떨어져 쓰이면서 요즘에는 외형적으로는 번듯하게 행동하지만 뒤돌아서서는 몰래 못된 일이나 행동을 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2조7498억원에 이르는 제주도의 2010년도 예산이 확정됐다.
제주도의회가 지난 24일 제267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회의에 참석한 의원 25명 가운데 찬성 21명, 반대 3명. 기권 1명의 표결로 제주도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을 승인했다.
▲‘눈먼 돈 먼저보는 놈이 임자’
올해 제주도의회의 예산 심의는 ‘눈먼 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는 공공재정의 속성을 재확인시킨 ‘역사의 불명예’로 기록되게 됐다.
제주도의회가 내년 제주도 예산을 승인한 열흘전인 지난 15일 오후 2시 제266회 제주도의회 정례회 본회의장.
“다들 가슴에 손을 대고 이번 예산심사가 공정했는지, 내년 선거를 염두에 두고 이상한 예산심사를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집행부가 선심성 예산을 편성했다고 꼬집으면서 우리 스스로 특혜 사업을 편성한 사례에 대해 어떻게 도민들 앞에 설명할 것이냐”
도의회 구성지 의원이 예산심의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지적했다.
“의원생활 12년 동안 이 같은 억지 예산, 나눠먹기 예산심사는 처음 본다. 앞에서는 선심성 예산이라고 지적해 놓고, 뒤에 가서는 자기 지역구 챙기기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제주도의회 의정사에 부끄러운 일로 남을 것이다”
김병립 부의장도 동료의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런데 불과 열흘 만에 원칙과 기준을 무시한 선심성 증액예산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감액․조정한 눈 가리고 아옹 식 심의를 통해 내년 제주도 예산이 의회를 통과해 확정됐다.
예산은 말 그대로 지방정부인 제주도의 살림살이를 뒷받침 하는 재정창고이다.
제주도는 내년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1200억의 지방채까지 발행하고 있다.
제주도는 올해에도 2500억원의 지방채를 발행했다.
▲호박씨 깐 의원들 유권자가 심판
이처럼 도민들의 혈세로 충당해야 할 막대한 ‘빚예산’은 결국 꼭 필요한 곳에, 절실히 어려운 우리사회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곳이 쓰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예산은 집행부인 제주도가 편성권을 행사하고, 의회는 편성이 적법하고 적절하게 이뤄졌는지를 살피는 예산 심의권을 행사한다.
두 개의 권한은 서로 독립된 채 상대의 원칙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이같은 권한은 법률로 행사의 독립성까지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심의과정에서 적지 않은 의원들이 이를 망각한 채 일부 단체와 지역구 만을 생각한 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덤비면서 문제를 키웠다.
집행부(제주도)에 대해서는 선심성 예산과 낭비성 예산이라며 만만한 공무원들을 불러내 별별 호통을 치면서 뒤돌아서서는 호박씨를 깐 것이다.
제주도 역시 당초에는 김 지사까지 나서면서 ‘원칙과 기준을 무시한 의원들의 멋대로 증액’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니 슬그머니 자세를 낮춰 예산편성권의 일부를 스스로 의회에 내주는 선례를 자초했다.
제주도와 도의회가 한통속이 돼 ‘짓밟힌 기준과 원칙’을 합법․정당화 시키는 결과를 낳으면서 또다시 이들에게 권한을 부여한 선량한 유권자들만 바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구성지․김병립 의원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호박씨를 깐 의원들을 심판하는 것은 결국 유권자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제주도정 역시 이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 흥 남
부국장/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