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무위당 장일순 선생
[세평시평] 무위당 장일순 선생
  • 제주타임스
  • 승인 20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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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 무위당(無爲堂) 장일순의 말이다.

무위당은 누구인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사람. 아인슈타인은 그가 요구한 자료를 보내면서 "당신의 나라에 여전히 거센 정치적인 열기가 남아 있다면 참혹한 상황을 겪어가고 있는 한국에 이 자료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보며, 또 그렇게 쓰이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그 후 30대 초반 이승만 정권하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무위당 장일순은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울대 미학과 선후배 관계이다, 원주에서 가톨릭을 매개로 결합한 세 인물,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김지하의 역사적 활동과도 연결된다. 70년대 지학순과 더불어 반독재투쟁을 한 재야운동가로, 김지하를 비롯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수많은 인사들의 정신적 지주로 큰 족적을 남겼던 분. 1994년 서거 당시 '내 이름으로 가급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공식적인 기념사업을 자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뿌린 밀알은 여전히 곳곳에 든든히 자리 잡고 있다. 늘 시대 흐름의 중심에 있었지만 한번도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올곧은 정신의 소유자. 첨예한 정치적 운동가였지만 이웃과 제자, 가족과 친인척 같은 일상적 관계에서도 한없이 존경 받았던 원효와 같은 해탈인. 서울 유학 시절을 제외하면 평생을 원주에서 지낸 진정한 지역인.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파격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한 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주,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 '광주'라면 몰라도 원주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낯선 이름이었다. 이곳이 1970년대 박정희 반군부독재 투쟁의 중심이 되었고, 탄압받는 재야 인물, 반체제 세력의 은신처·보호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원주하면 무위당이 주도했던 한살림운동이 떠오른다. 생명사상에 바탕을 둔 한살림운동은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생활협동조합 운동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는 협동조합운동과 한살림운동을 벌이며 원주를 협동조합의 도시로 만들었다. 원주는 한살림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모태로 여전히 남아있다. 원주에 협동조합협의회가 구성되고, 그 산하에 각기 다양한 성격의 협동조합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원주의 지성인 무위당 장일순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무위당은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는 사람을 뜻한다. 호수 한가운데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있는 듯 마는 듯하지만 결국 그 기름띠가 호수를 둘러싸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일순은 말년의 아호를 일속자(一粟子)로 정하여 스스로를 한 알의 작은 좁쌀로 낮추었다. 그를 통해 경쟁과 투쟁의 논리를 넘어서, 협동과 생명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좁쌀 한 알 속의 우주'를 더욱 맛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현재 원주에서는 생명평화운동의 지평을 열어갈 ‘무위당 생명평화 기념관’을 추진하고 있다. 안정적으로 그를 기리는 사업을 하는 일, 그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고 그의 유품들을 정리하는 일, 현실의 생명평화운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정책연구와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중요할 듯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죽고 나서 서로 소원했던 삶과 만남들을 회복하고 이 땅의 생명평화를 위해 할 일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리라.

김  관  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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