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과 황현
장지연과 황현
  • 제주타임스
  • 승인 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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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張志淵)과 황현(黃玹)은 구한말(舊韓末)을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同時代人)이다.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경북 상주 태생이다.

그리고 평생 향리에서 시작(詩作)에 전념하던 올 곧은 선비 황현은 전남 광양 출신이다.

장지연은 일본과 대한제국의 매국노들 사이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불후의 명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싣고 일본과 적신(賊臣)들을 통렬히 논박했다.

특히 적신들을 향해서는 “개 돼지만도 못한 놈들”이라며 크게 꾸짖었다.

이 사설로 신문은 정간 되고 장지연은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장지연은 출옥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잠시 해조(海潮)신문의 주필이 되지만 그 후 귀국, 경남일보 주필이 된다.

절명시(絶命詩)로 유명한 황현은 장지연과 달리 재야에 묻혀 지냈다.

 황현이 1910년 한일합방, 즉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것도 고향 전라도 땅에서였다.

그에게 경술국치는 참을 수 없는 분함이이요, 원통함이요, 치욕이었다.

나라 잃은 절망감은 결국 그를 자살케 했다. 황현은 자살에 앞서 ‘절명시’를 남겼다. “…오늘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만 하늘을 비추는 구나”란 통한의 시를 남기고 갔다.

그런데 이 ‘절명시’를 경남일보 한 귀퉁이에 올려놓은 것이 바로 장지연이다. 1910년 10월 11일의 일이다.

4년뒤 경남일보는 폐간 되었고, 황현의 절명시를 실은 장지연 주필은 여전히 일본인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장지연이 민족문화 연구소 등이 펴낸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 됐다 해서 말들이 많다.

장지연을 친일파로 낙인찍은 이유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일본 시책을 미화-옹호하는 글과 한시를 발표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것이 1910년이요, 바로 이해에 장지연이 황현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게재한 점, 그의 사망연대가 1921년인 점 등을 감안하면 그가 친일을 한 것은 10년 어간인 셈이다.

하지만 총독부기관지에 친일하는 글과 한시가 남아있다고 해서 장지연을 친일파로 단정 짓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장지연의 글이라 해도 일본의 협박과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일 수도 있고, 이름을 도용당한 것일 수도 있다.

민족문화연구소가 장지연을 알기 위해서는 편찬 작업 8년이 아니라 80년이라도 더 연구했어야 했다.

역사적 진실이라는 게 100년, 500년 후 밝혀지는 예가 흔한데 장지연을 조급하게 친일로 단정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일본에 의해 생명을 위협 받았을 수도 있고, 이름을 도용당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언젠가는 그러한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  경  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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