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꼭두각시 역할 충실
‘정운찬과 강지용’. 한사람은 각종 도덕적 하자와 불법의혹에도 통치 권력의 무동(舞童)을 타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라 희희낙락(喜喜樂樂)이다.
다른 한 사람은 같은 권력에 밉보여 교수 직접선거에서 선출된 대학총장자리에도 오르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고군분투(孤軍奮鬪)다.
정운찬 총리와 강지용 제주대 교수, 여기서 두 사람의 퍼스넬리티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두 사람에게 들이댄 인사 권력이 너무 형평성을 잃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한 사람에게는 솜방망이도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철퇴(鐵槌)로 내리쳤다.
국가공무원법(64조) 적용에서 그렇다. ‘공무원의 영리업무 및 겸직 금지’를 규정한 조항이다.
여기서 교육과학기술부는 관련 규정을 ‘솜방망이와 쇠방망이’로 재단했다. 이중 잣대다.
“국민에 봉사해야 하는 공무원조직이 청와대 눈치만 보며 권력의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법을 해석하고 주무르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 법규해석
정운찬 총리는 서울대학교 교수 출신이다. 총장도 역임했다.
그런데 정총리는 교수와 총장 재직 때 영리기업의 고문과 재단이사, 외국인 투자기업 등기이사 등으로 겸직했다.
그리고 강의료 등으로 연간 억대의 보수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소속 기관장 허가 없이 다른 직무를 겸할 수 없다”는 국가공무원법(64조) 규정 위반이다.
이 규정대로라면 대학 총장직은 고사하고 대학교수직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서울대 총장이 되었고 승승장구 대한민국 총리까지 되었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교과부는 지난 7일 국정감사 서면답변에서 “행위의 지속성이 없으므로 겸직 대상으로 보기 어려우나 최종적으로는 해당 기관장이 판단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이런 교과부의 입장은 이해할 수가 없다.
교과부는 이보다 4개월 전인 지난 6월, 교수직선에 의해 선출된 제주대 강지용 총장 임용후보자에 대해 ‘국가공무원법 겸직 금지조항‘을 들어 총장 임용제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집 없는 교수들의 아파트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았었다는 이유에서다.
무보수 봉사활동이었고 사실상 기관장(제대총장)도 인정했던 활동이었는데도 그랬다. 교과부가 말하는 행위의 지속성도 없었다.
교과부의 법규 해석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국민을 기망(欺罔)하는 잣대로 재단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침묵하는 부끄러운 지성 집단
‘법률은 거미줄과 같다. 약자는 걸려서 꼼짝을 못하고 강자는 빠져 나간다’. ‘이나카르시스’의 말이다. ‘정운찬과 강지용의 사례‘는 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법언(法諺)이 오늘까지도 열심히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법’이라면 어떻게 사회정의가 일어설 수 있으며 어떻게 법치(法治)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같이 제멋대로 법치에 지성이 침묵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침묵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팔짱끼고 사태를 즐기고 있다는데 있다.
교과부의 제주대 총장 임용후보자 제청거부는 바로 대학 자율화에 대한 중대한 압박이다.
교과부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교수들의 총장 선출권을 박탈하겠다는 원려(遠慮)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학문의 자유와 양심과 정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지성 집단이 슬금슬금 눈치나 보며 제 밥그릇이나 챙기려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교과부의 횡포에 부역(附逆)하는 일이다.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