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케이블 TV채널(NO404)영어방송에서 한 여성 영어 강사가 낭독한 시다. "The better to have loved and lost then never to have love at all......... 한번도 사랑해 본적이 없는 것보다 사랑해보고 잃은 것이 차라리 나으리 ......“ 사랑을 잃은 것만큼 아프고 슬픈 일은 없지만 그 지독한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할 수 있었고, 사랑의 대상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노래한 시다.
이 시 구절을 찾아 봤더니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테니슨의 17년간을 생각하며 연모하고, 그리면서 죽은 친구 핼럼에게 바치는 애가(哀歌)였다.
나도 유명을 달리한 피붙이에 대한 잊음이 어려워서 항시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창피한 일이지만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어디를 걸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지인과 말을 할 때에도 삶의 한에 대하여 소리 없는 간단한 주문으로 기도한다.
그렇게 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져서 그렇다.
죽음의 이별에 붙이는 이 비가(悲歌)를 접하고는 답답하고 꽉 막힌 것만 같은 마음에 어느 정도의 여백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느껴보지 못한 새가 여름 숲의 싱그러운 초록색 향연을 느낄 수 있을까? 죽음으로써 평화가 탄생한다는 희생을 모르는 포로의 평화주장은 진정한 평화 일 수 없듯이 이별의 아픔을 경험 해보지 못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의 기원에는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되어 오고 있다. 아가페 사랑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무조건적, 일방적인 절대적인 사랑이다. 바이블에서 전해진 사랑이다. 자신의 희생으로써 실현되는 사랑, 인간과 신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반면에 에로스 사랑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인식은 성(性) 본능이나 자기 보전 본능을 포함한 생의 본능개념으로 영국의 유명한 대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아가페 사랑은 살아 있는 한 절대적인 관계의 생성(生成)으로 자신과 상대가 구분이 없는 하나 되는 사랑이다. 또 불교에서 전해오는 “공(空)”의 사랑이다.
불교의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중심사상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사랑이다. 형상과 색체를 가지고 직관적 감각으로 인식되는 모든 존재(物質)는 결국 공(空)에 불과한 것이므로 자신을 초월한 사랑이다.
반면 일반론적인 에로스 사랑을 남녀의 사랑으로 좁혀본다면 남자는 여자에게서 나왔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여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남자는 황폐화되고,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 또한 황폐화 할 수뿐이 없는 세상이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생을 유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으로 알려진 소로몬 왕은 애초부터 왕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를 얻었다. 성경(잠언)에 따르면 솔로몬 왕은 매혹과 소중한 노래로 연인을 “나의 누이여, 나의 신이여, 그대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렇게 뜨겁고 소중한 사랑의 노래로, 에로틱한 사랑을 연출했다고 한다.
아가페와 에로스는 둘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아가페와 에로스가 하나가되는 소로몬왕의 사랑 법은 삶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요즘에도 이런 남녀 간의 사랑이 있을까? 남녀 간의 사랑 뒤에는 경제적 이해타산, 출세할 수 있는 배경, 외모, 스팩 등등으로 사랑시장(市場)에서 사랑 가격이 매겨진다.
요즘 젊은이들이 남녀 사랑세태도 너무 스피드 하게 이루어진다. 정열이 아니라 코스대로 신속하게 사랑을 파괴시킨다. 만나면 원 나이트 스탠드란다.
물론 모든 세상이 이치가 그렇듯 성욕도 자제가 힘든 것이다. 온몸이 금세라도 폭발 해버릴 것 같은 격정의 황홀경을 동경하는 것은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향락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요즘 영화, 드라마 제목이나 내용도 성 에피소드라기보다 하드코어 포르노 급이다. 이런 환경의 영향도 있을 테지만 집착과 환상의 미련을 버려야 한다.
소로몬의 아가페와 에로스가 같다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은 맥락인지도 모른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