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의 생명은 신뢰성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선의의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 총리였던 ‘벤자민 디즈레일리’의 말이다. 여론조사 등 사회통계학의 경구(警句)로 자주 인용된다.
통계와 수량분석의 가치를 깨닫고 전용 통계사무소까지 설치하여 활용했던 ‘처칠‘도 한마디 했다. “나는 내가 조작한 통계만 믿는다”. 모두가 ‘조작된 통계’나 ‘믿을 수 없는 통계‘를 비틀어 짜는 말이다.
여론조사도 통계의 밑반찬이다. 계량화된 수치를 이용하는 사회방법론의 하나다.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의견을 수집하고 미래 예측의 자료로 활용된다.
그러기에 여론조사의 생명은 신뢰성에 있다. 여론조사가 신뢰성을 잃어버리면 이미 사회통계학적 가치를 잃어버린 쓸모없는 쓰레기 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같은 쓰레기가 여론조사의 탈을 쓰고 여론조작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가장 과학적이고 신뢰성이 담보되어야 할 여론조사가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로 여론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선거철에 더욱 그렇다.
무책임한 여론조사 보도
‘못 믿을 여론조사’의 예는 많다. 여론조사의 함정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1936년 루즈벨트와 렌던이 맞붙었던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는 렌던의 압승을 예측했다. 그러나 결과는 루즈벨트의 압승이었다.
‘브래들리 역설’도 있다. 1982년 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여론조사 예측은 ‘브래들리 압승‘ 이었다. 이 이 역시 선거결과는 상대 후보 압승이었다.
멀리 미국의 예를 들 필요가 없다. 제주에서도 ‘여론조사의 함정‘은 있었다. 지난 8월 김태환지사의 주민소환과 관련, 한 시사주간지는 ’소환투표 참여 49.1%’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그러나 투표율은 11%가 고작이었다.
당시 한 인터넷 신문도 ‘반드시 투표 참여 48.0%, 아마도 투표참여 19.7%’라고 전화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었다. ‘95%의 신뢰수준, +-3.1% 오차범위’라는 이 여론조사 결과대로라면 투표율은 오차범위를 감안하더라도 44.9%에서 70.8%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 투표율과는 33%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어떻게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 기법을 동원하는 여론조사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여론조사 과정에 나타난 오류를 숨기고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해 발표하는 ‘언론의 무책임한 여론 조작’이라는 비판이 나왔던 이유다.
경계해야 할 ‘조사의 함정’
내년 6월 도지사 선거와 관련한 도내 일부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발표도 ‘무책임한 왜곡’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표본의 크기나 접속률과 응답률, 무응답층의 기준, 출마의사를 밝히지 않은 사람까지 선택항목에 포함하는 등의 선택항목 배치나 설정 등 오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계학적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유의미한 신뢰성을 얻기 위해서는 응답률이 50%이상 나와와 한다. 이는 여론조사의 상식이다. 선진국에서는 30% 이하의 응답률일 때는 결과를 폐기한다고 한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에서는 여기에다 무응답층이 20% 이상이면 여론조사 신뢰성 상실로 판단한다.
우리나라 여론조사기관이나 언론사 대부분은 이에 아랑곳없다. 30%미만의 응답률, 심지어 10%대 응답률의 여론조사 결과도 버젓이 발표하기 마련이다. 예의 김태환지사 소환투표 관련 응답률은 12.5%였다. 열 명 중 한 두 사람 의견이 다수 여론인양 왜곡됐음을 반증하는 사례다.
선거관련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접속률과 무응답층의 기준에서 신뢰성을 확보할 수 없다면 조사결과를 폐기해야 옳다. 무의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작이나 여론왜곡에 앞장서는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언론이 추방해야 할 사이비 언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론조사의 함정’은 내년 지방선거 여론조사와 관련해서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언론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일 수밖에 없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