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죽산 조봉암 선생
[세평시평] 죽산 조봉암 선생
  • 제주타임스
  • 승인 200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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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진보진영의 화두는 단연 죽산 ‘조봉암’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잇따라 죽산에 대한 토론회를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왜 죽산 조봉암일까? 그는 제헌국회 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으로서 참여해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현재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청원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추모비도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진해공원에 세워졌다. 사단법인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도 꾸려졌다. 생가 복원 · 자료발굴은 물론 역사의 재평가를 통한 ‘명예회복’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죽산은 일제하 독립운동의 와중에서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건국 이후 노동자와 농민 등 일반 대중의 생활보장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미 반세기 전에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으니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그의 확고한 민주주의관은 의회의 중요성이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죽산이 간첩혐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그가 남긴 유언도 큰 울림으로 다가서고 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승자로부터 패자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은 삼일운동 당시 한 달 동안 이어진 만세운동을 지휘한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옥살이를 했다. 그 후 공부에 대한 열망도 불타올라 1920년 7월 도쿄현 기차표 한 장을 사들고 주말엔 엿장수를 해가며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론서들을 탐독해 나갔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 머물며 더욱 확고한 신념을 쌓은 죽산은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경찰에 붙잡히면서 결국 일본 경찰에 신병이 인도돼 7년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죽산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진보당 추진위원회 후보로 나섰다. 총 투표수 900여만 표 가운데 216만 표를 얻었다. 비록 낙선했지만 우파 이승만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이승만은 ‘위협적’ 정적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민의원 선거를 앞둔 58년 1월 죽산은 진보당 간부들과 함께 체포됐다. 죽산은 대법원 판결 이후 재심을 청구했지만 소용없었다. 재심 청구 기각 다음날인 59년 7월31일 사형이 집행됐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조봉암이든 박헌영이든 간첩이 아니잖아요. 이승만 김일성 권력에 희생된 거지. 이남에서는 조봉암을, 이북에서는 박헌영을 명예회복시켜야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어요.”

죽산이 사형이 집행된 지 50년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우리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 국가에 의해 처형된다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을 안고 살아왔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사회민주적 정책'을 말한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처단되는 어처구니없는 국가 폭력을 인정하며 살아왔다. 죽산은 한국에서 처음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전향 후 공산독재에 철저하고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인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던 죽산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는 한, 그리고 그와 진보당이 추구했던 정치적 실험이 온전히 평가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불구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너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너희 시대의 조봉암’이라는 것 아닌가. 죽산은 희생자이기 이전에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고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으며, 이 나라와 국민의 삶에 실제적 은덕을 끼친 사람이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죽산의 처형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했다. 국가의 사과와 피해 구제·명예회복 조치도 권고했다. 반세기 만에 누명을 벗었다. 예전에는 ‘좌익’이니 ‘간첩’이니 딱지가 붙어 있던 이들도 복권이 되었고, 더러는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이 추서되기도 하지만, 유독 죽산은 아직도 ‘사형된 간첩’이다. 죽산에게 죄가 있다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 개혁을 성공시킨 죄가 있겠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 너무 많은 표를 얻은 죄도 크다. 민주화가 된 지도 20년이 지났다. 여운형을 포함해 진보 계열의 정치 지도자 대부분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공식 문건에서 여전히 죽산은 간첩죄를 저질러 사형된 범죄자로 남아 있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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