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의 상징이었던 ‘춤바람‘
‘춤 선생’하면 우선 떠오른다. 카바레, 제비족. 춤바람 등이다. 불륜과 퇴폐와 가정파탄은 여기서 이어지는 연상(聯想)이다.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까지도 ‘춤바람’은 윤리를 좀먹는 사회악으로 손가락질 받아왔다.
50년대, ‘교수부인과 제자간의 춤바람’을 소재로 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필화사건은 당시 봉건적 사회질서와 전통적 가치관이 얼마나 강고(强固)하게 뿌리내렸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를 풍미(風靡)했던 ‘춤바람’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었다. 문화충격이며 윤리충돌이었다.
50년대 말 댄스홀에서 만난 70여여명의 여성을 성적으로 농락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박인수 사건’, ‘고위층 부인 안순애와 제비족의 간통사건’, 69년 어느 제비족이 정보기관 고위간부 아내를 건드렸다가 전국제비족 중 가장 춤 잘 추는 순으로 7명을 골라 사법처리했던 소위 ‘7공자 사건’은 춤바람이 만들었던 ‘윤리의 덫’이었다.
70년대 해외취업 붐으로 남편들이 피땀 흘리며 벌어 보낸 월급을 장바구니 아내들이 작살냈던 곳도 카바레요 춤바람이었다. 그래서 ‘춤 선생‘은 바로 춤으로 여자를 유혹하고 농락하는 ’제비족‘의 다른 이름이었다.
‘춤 선생’께 바친 감동 무대
오늘 이야기 주인공도 ‘춤 선생’이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제비족 이야기가 아니다. 35년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무용선생 이야기다.
이창훈(63). 그는 제주남자 최초로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춤을 백안시하던 60년대 시대상황, 그것도 유교적 전통 윤리체제에 길들여졌던 안덕면 사계리의 가부장적 가풍이 근엄했던 가정에서, 1남6녀의 맏이이며 외동아들인 그가 여성전유물로 여겨졌던 대학의 무용과를 지원했고 부모가 ‘아들의 끼‘를 수긍했던 것은 당시에는 시골마을의 큰 사건이며 입방아 찧기 좋은 화제였다.
그런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춤(무용) 선생이 되어 제주에서 35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퇴임한 것이다. 그의 아내와 두 아들 두 딸 등 여섯 식구 모두가 무용전공이다. 보기드믄 무용가족이다.
그가 양성한 무용전공의 전문 인력만도 30여명을 넘었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무용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제자 30여명이 그를 위한 춤판을 마련했다. 27일 저녁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다.
‘이창훈 선생님께 드리는 제자들의 공연, ’춤.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마련한 ‘사은(師恩)의 춤사위’였다.
마음 찡한 감동의 무대였다. 가을밤을 수놓은 아름다운 ‘보은(報恩)의 율동’이었다.
잊지 못할 가을밤의 추억
밖에는 거센 비바람이었다. 그러나 공연장 안은 아름다운 율동과 선율이 어우러진 감동의 물결이었다.
뜨겁고 진했다. 나비처럼 부드럽고 백조처럼 우아한 날개 짓, 때로는 거센 파도가 되어 무대를 덮치는 격렬하고 역동적 몸짓, 곤두선 세포조직은 바늘로 찌르듯 파고드는 전율이 되어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춤사위를 직접 경험하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영상을 통해 스치듯 일별(一瞥)했던 경험이 고작이었다.
그러기에 첫 경험의 춤사위에 주눅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몸을 죄었다.
누가 ‘표현 예술의 백미(白眉)는 몸짓’이라고 했던가. 인간의 몸짓을 저렇게도 아름답게 꾸며낼 수 있다니,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춤 선생’을 위해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 그리고 벨리 댄스와 재즈댄스를 엮어 ‘보은(報恩)의 매시지’를 전했던 제자들의 정성은 그래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짜릿하게 했다. 포근하고 뭉클하게 했다. 그리고 흐뭇했다.
팍팍한 시대에 스승과 제자간의 이 같은 사랑과 존경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아름다운 가을밤의 추억이기도 하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