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와 원로의 함수
지역사회와 원로의 함수
  • 제주타임스
  • 승인 200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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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일에도 원로가 나설 일이 있지만 지역사회에서도 원로의 역할은 필요할 때가 많다. 정치를 하다가 혼란에 빠진 위정자들이 종교지도자를 찾아가거나, 각계 원로를 방문해 조언을 듣는 광경은 흔히 목도되는 일이다. 엊그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헌정회를 방문한 일도 난마처럼 얽힌 현 정국에 대한 원로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풀어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지역사회에서도 주민 간 갈등과 분쟁이 깊어질 때 원로들의 충고나 훈수는 금과옥조처럼 통할 때가 많다. 그러기에 원로가 많이 있는 사회는 그만큼 건강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제주사회는 언제부턴가 ‘원로가 없는 사회’로 빈정거려지고 있다. 원로로 역할을 할 만한 어른들이 그 역할을 방기(放棄)함으로써 빚어지는 현상이다. 원로는 안됐다 싶을 때 쓴 소리를 해야 하고 그것이 도민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쓴 소리를 하려면 쓴 소리가 먹혀 들어갈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돼야 한다.

 권력에 빌붙어 떡고물을 주어 먹거나 권력의 부패에 동조하며 사는 어른에게서 쓴 소리가 나올 리도 만무하지만, 들을 사람들이 없다. 제주사회에 원로가 없다는 탄식은 여기에 연유한다. 권력과 초연한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고언을 아끼지 말아야할 어른들이 권력과 야합하는 세상에서는 원로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랜 세월 높은 자리에서 권력과 추종의 맛을 볼대로 보고 퇴임한, 이젠 후배들에게 덕담이나 들려줘야 할 원로가, 낙마한 권력을 다시 잡아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판치는 세상이다. 이런 사회에는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권력의 뒤를 좇는 천박한 또 다른 어른 기회주의자들이 행렬을 짓고 있다.

궁상(窮相)과 비열함, 우리가 보는 오늘 제주 원로들의 일그러진 초상은 이처럼 초라하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유기농업을 선도할 농업회사를 창업한다는 소식은, 제주지역의 원로와 제주지역사회의 함수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제주도지사를 지낸 사람이 수렁에 빠진 제주도의 1차 산업의 선도역군으로 나서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진정한 원로의 역을 자임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가 그에게 드리워졌던 도지사, 축협중앙회장 등 권력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순수한 농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원로의 길을 걷는 것이면서 팔팔한 농삿꾼 현역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갈잠방이 작업복을 입고 유기농수축산업을 위해 뛰어든 그의 창업이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함은 물론, 마침내 진정한 원로로 남아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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