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고 애잔한 삶을 견디어 내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어머니에게도 엄연히 실재했던 자신만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이 없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인생살이를 천층만층 구만 층이라고들 한다.
사람 사는 것이 제각각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어떤 사람은 채워나가는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비워내는 것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
본격소설 저자인 일본 작가 미즈무라미나는 글을 쓰는 이유를 삶을 견디어 내기 위해 쓴다고 했다.
그는 삶의 질곡이 많은 인생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책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삶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개나 닭을 키우고, 어떤 사람은 노부모를 모시며, 어떤 사람은 글을 쓴다.
“엄마를 부탁해” 저자의 말을 빌리면 “모든 삶은 자신의 잘못도 없이 곤두박질치는데도 가족을 위해, 삶을 내려놓지 않고 꿈을 기르고 사랑을 번식시키는 것으로 매번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면서 삶을 견디는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무름에 대해 자신 있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삶의 근거이자 보루가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것은 자유와 발전을 구속하는 올가미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가족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 할 수는 없다.
가족은 영원한 삶의 둥지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책임이 삶을 견디는 근원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엄마(박소녀)도 견디기 위한 삶이다.
남편의 무심과 출분을 견뎌야 했고, 어린 자식과 시동생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늘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큰아들에 대한 가난한 미안함이 평생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정신과 몸 건강이 위태위태하면서도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늘 마늘 밭에서, 헛간 평상위에서 삶을 손에 들고 산다.
이게 가족을 지키는 모성이다. 모성뿌리가 가족이라는 가지를 만드는 것이다.
“너는 (소설가 셋째 딸) 지금 이탈리아에 와 있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에필로그(epilogue)에서 성베드로 성당에서 창세기 이래 인류의 모든 슬픔으로 표시되는 예수의 주검을 연약한 두팔로 끌어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 을 본 그의 딸(너)은 넋을 잃고 잃어버린 지 구 개월 된 엄마가 마치 돌아온 듯한 깊은 위로와 “엄마를 부탁해”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의 외침으로 한을 달랜다.
이 조각상은 이탈리아의 대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죽음 직전까지 조각하다 미완성으로 남긴 피에타상이다.
이 조각상은 가족이라는 의미의 진실을 조용히 응변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엄마는 딸이고 딸은 엄마다.
작가는 말한다. 지금 자식들의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 서 있는 어머니들의 이루어낸 것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이 어머니 길을 가야 한다고 한다. 이게 가족이다.
그러나 지금의 급변하는 가족문화는 고전적인 어머니 이미지는 각박해가는 세파에 빛깔이 바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읽은 서하진의 단편“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의 한 대목이다.
부와 명예, 단란한 가정 등 부족함이 없었던 암환자가 가족이라는 것은 빈 껍데기 같은 것임을 깨닫는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부담이 되는 경우의 테마다.
“아주 오래된 농담” 오래 전 나온 박완서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가족이란 농담처럼 어이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오래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게 삶에 앞서가는 이 소설가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젠 진짜 모를 일이다. 이 농담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옛날 어머니상은 각박한 세파에 씻어지고 있으며, 일인가족, 다문화 가족, 미혼모 가족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가족 형태를 보면서, 가족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때로 다른 가족에게 부담이 된다면 이 “농담”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속절없는 생각을 해본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