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라디오에서 저녁7시부터 9시까지 생중계하는 ‘열린 토론’을 듣는 습관이 생겼다.
그 시간에 청취를 못하면 다음날 새벽2시부터 3시 40분까지 하는 재방송을 들을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 들으면서 우리사회가 경제적, 계층적, 지역적, 이념적 양극화를 넘어 생각마저 양극화 되고 있는 것만 같다. 전문가들의 하는 토론에 주제넘은 말이지만 결론은 패널모두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생각은 정반대다.
예를 들면 경제정책에도 감세를 하면 한쪽은 가처분 소득이 높아져 내수가 생기고 투자가 늘어서 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경제이론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감세를 하면 적자예산에 따른 재정의 건전성위기문제, 국가신인도, 등등 경제성장에 맞지 않다고 맞선다.
또 청취자의 질문도 찬성과 반대자 수가 거의 같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경제 이론은 주장하고 싶은 대로 주장 할 수 있는 학문이다.
현실을 100%해결하는 정책은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대다수 청취자의 눈높이에 맞아야 되고 이론보다는 시류가 핵심이다.
지금은 정보홍수로 특별한 분야를 제외한 인문과학 등 분야는 전문가와 비전문가 차이가 좁혀지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전문패널리스트(panelist)의 말보다 청취자의 질문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각의 양극화를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어느 쪽이든 한 벼랑 끝의 생각으로 추진된 시책에 대한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정답은 분명히 찾아온다.
잘못된 생각에는 혹독한 값을 엉뚱한 중산층이 부담하는 것은 불보 듯 뻔한 것이다. 왜 이럴까? ‘왜(why)?’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원인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why)?’가 부족한 것 때문에 집단적 분노의 좋은 사례를 읽은 기억이 난다. 미국이 벌여온 테러와이 전쟁이다.
9.11 테러라는 미증유의 사건에 맞닥뜨린 미국은 즉각 범인 응징을 위해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했고, 중동은 전쟁터가 되었다. <나는 미국이 딱 절반만 좋다. 북앤월드, 이진>의 저자의 말이다.
그가 공화당 지지자들과 같이 TV토론을 보는데 진보적 잡지<더 네이션>의 여기자가 “미국이 지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누구‘보다도 ’왜?‘ 이런 전쟁 발상을 했는가?”를 질문을 했다. 응징보다는 반성을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TV를 보던 한 중진 상원의원의 흥분해서 “ 이 빨갱이 같은 X”라고 쌍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생각 속에서 시작한 테러전쟁이 7년을 넘겼으며 테러는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 이슬람의 증오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왜?‘라는 성찰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 cyworld, com/pims>
왜?라는 성찰 부족은 생각의 양극화를 만들고, 생각의 양극화는 이분법적 이념으로 심화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이념을 우선하는 것은 경제적 실익을 찾는 것보다 이념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념과 거리를 두어야 할 먹을거리조차도 이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입 쇠고기나 수입 과일을 먹을 때는 집단 농성을 하는 농민들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국산을 먹느냐, 호주산을 먹느냐, 미국 산을 먹느냐 하는 문제는 어느덧 음식 선택이 아니라 이념 선택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수입과일, 수입쇠고기를 먹으면서 이념을 떠올린다는 것은 생뚱맞은 일이지만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과잉의 한 단면이다.
물론 원칙과 가치지향의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이념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편향된 이념의양극화는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 계층간 갈등과 불안만을 증폭시키는 구실을 만든다.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 갈등, 대립, 투쟁의식들에 대해 대다수 중산층들은 중도(中道)라는 중간 생각으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래 중도는 연기(緣起), 공(空)과 함께 불교 핵심 사상이다. 너와 나,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선과 악, 괴로움과 즐거움 등 상대적인 두 극단을 구분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런 여유와 여백이 있는 중도를 찾기 위해서는 ‘나’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나를 앞장세우면 네가 있고, 다름이 있고, 다툼이 벌어지고, 차별이 생기기 때문이다.
생각의 양극화를 지양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버려야 바른 생각이 떠오른다. 주제넘은 생각이고, 양쪽에서 욕먹을 말이지만 말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