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용서와 화해라는 말을 너무 흔히 쓰고 있다. 남발(濫發)한다고나 할까. 특히 우리 고장에서 4.3때만 되면 누구나 한마디씩 던지는 단어가 이 ‘용서와 화해’이다.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다. 죄(罪)와 잘못 등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벌하지 않거나 꾸짖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이처럼 쉽게 풀이하고 있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종교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하는 일이다. 인간은 육신(肉身)을 지니고 있기 까닭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안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용서’라는데 있다. 자연(自然)은 자연 그대로 살다가 아무 원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지마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다가 그 한(恨)을 품은 채 떠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 나를 미워하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 그래서 나와 원수가 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다른 이들에게 피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화나 적개심 등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소화가 안되고, 안절부절 좀체로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이를 두고 정신의학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죽이는 독소(毒素)라고 한다. 정신건강과 오래 살기 위해서도 용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늘 불평불만을 하게 된다. 남들은 이런 사람을 꺼려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에게 ‘까다롭고 피곤한 존재’로 낙인(烙印)받지 않기 위해서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용서만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용서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평소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고 ‘나를 과감히 버리는’ 인내와 결단이 필요하다.
누구든 미움과 상처, 분노와 원망을 지니고 있을 터이다. 필자도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우울 속에 갇혀 있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복수심에 불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많았다.
어느 날 좋은 글을 읽었다. 카톨릭 계통에서 나온 아주 조그만 책자에서이다. “미운 사람, 보기 싫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되는 적요(寂寥)한 곳에서 살고싶어 산(山)속으로 들어 왔는데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직접 시도(試圖)해 보았다.
매일 밤 자리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미운 사람부터 차례로 축복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활에 활력이 넘치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워졌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이렇게 큰 은혜가 될 줄은 몰랐다.”
용서 없는 화해(和解)는 불가능하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이다. 진정으로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마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줄 알아야만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다. 4.3만 해도 그렇다. 나 자신을 먼저 용서한 연후에, 남을 용서하고 화해·상생의 길로 나서야 한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이 어디 쉽사리 잊혀지겠는가마는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용서하지 않을 수 없지 아니 한가. 그래야만 내가 자유로워지고 우리 모두가 잘 살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주산업정보대학장 이 용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