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 지도층인사 자녀들의 호화결혼식 지탄뉴스를 가끔 본다. 우리지역에서도 사회 지도층에 있는 분들의 현직에 있을 때 자녀를 결혼 시켜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몇 년 전 일이지만 어느 공직기관장의 자녀 결혼식에 축하객들이 지나치게 몰려 피로연호텔 앞 도로가 막혀서 교통경찰까지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행태들은 그 하나하나가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을 울릴만한 공직윤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육지 대도시에서는 70년대 후반기부터 식당에서 결혼 피로연을 했었다.
그 당시에 제주에서는 식당에서 결혼 피로연을 한다며는 거부반응이 있었고 못사니까 집에서 피로연을 차리지 않고 식당에서 하는 것이라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제주시는 중소도시여서 시내 어느 집안이나 생활정도를 가늠 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 당시에 잘사는 지도층 몇몇 분들이 식당에서 결혼 피로연을 하기 시작 했다.
그 후 많은 보통서민들도 떳떳하게 식당에서 결혼 피로연을 따라 했었고. 지금 식당피로연 문화가 정착 되었다.
보통 서민들은 지도층의 하는 생활문화를 뒤따른다. 뱁새가 황세 따라가다가 가랑이를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가계부채를 내면서도 눈물겹게 가진 자들을 따라가면서 자존심을 지키려하는 것이다.
그게 성공한 사람들의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역 경제뿐 아니라 정신문화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층에 있는 분들의 과시적 결혼 행태는 명백한 넓은 의미의 경제사범이다.
부도를 내고, 시장경제 룰을 위반한 자만이 경제사범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억누르는 경제사범은 눈으로는 범죄로 안 보이고, 계량화 할 수 없는 것에서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범죄가 있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이 높은 이는 이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진다)가 이런 문화를 주도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경제력과 법적제도라도 좀먹은 기둥처럼 사회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도층의 ‘힘과 존경’은 깨끗함과 ‘보편적 겸손’에서 나온다. 그래서 지도층 경제학이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호화결혼식도 지도층에서 경건하고 간소한 결혼 문화를 먼저 시작해야한다.
인생여정을 같이할 수 있는 아주 친한 친지로 제한해서 초청장을 보내고 간소하고 축복받는 결혼식문화를 지도계층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
지금은 시대가 하루가 다르게 시간적으로 변하고 있는 세상이다. 또 빈부의 격차도 계속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위20%소득이 하위20%소득에 8.6배가 된다는 보도다.<조선일보6월5일>
뿐만 아니라 최근의 세계경제위기와 관련하여 유럽에서는 ‘경제성장 없는 번영’이 이슈가 되고 있다고 한다.<팀잭슨저, 세종연구원, 금기현 > 지금까지 서구 산업사회가 추구해 왔던 경제성장방법으로는 지구의 제한된 환경조건 하에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장 없는 경제체제하에서는 소비 생활은 축소된다. 내수 진작이라는 소비도 부가가치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축제도 행사도 줄이고, 더구나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생활도 그만두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을 조장하는 홍보산업 또는 생산업도 점차 퇴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벤트 축제 등이 축소는 행복감의 축소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축제와 과시를 자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도층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이게 지도층의 경제학이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유교의 성전이라는 논어에 그려진 자제의 모습이다.
또한 스스로 절제하는 삶이 과시하는 삶보다 즐겁다는 것은 세계의 철학자들의 수 없이 말해온 지혜다. 또한 예로부터 동양철학의 근본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처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규범이고 풍속문화다. 동서양은 물론, 희랍의 민주주의나 로마의 공화체제에서도 공공질서의 초석은 지도층의 ‘겸손과 깨끗함’이라고 역사가 말하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