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는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군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YMCA다락방에 모여 친구들과 함께 숨죽이며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있으면 나는 늘 이 노래를 부른다. 언젠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친구들이 어울리지 않는 노래라며 나무란다. 그래서 다시〈사랑으로〉를 불렀더니 그래도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둥거린다. 소위 ‘뽕짝’을 부르라는 주문이다.
〈상록수〉는 1977년 김민기가 만든 노래이다. 그가 제대를 하고 공장에서 노동을 할 당시, 동료들의 합동결혼식에서 축가로 불리며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부평 작은 공장에서 시작된 노래가 서서히 저항세대의 애창곡이 되었다. 70년대 후반 정권은 곧바로 이 노래의 방송을 금지했으며 5공 중반까지 주로 운동권의 입으로만 생명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20여년이 지난 1998년 외환위기를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공익광고에 쓰이면서 다시 시대의 주제곡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물론 노래와 함께 가수 양희은과 작곡가 김민기는 봉쇄됐던 인생의 굴곡을 지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2년 3월 1일 <상록수>는 다시 한 번 변신하여 우리에게 다가왔다. 3ㆍ1절 기념식장에서 양희은이 검은 치마, 흰 저고리 차림으로 <상록수>를 축가로 부른 것이다. 대중가요, 그것도 운동권 가요가 정부 행사에서 공식 축가로 불리기는 처음이었다.
또다시〈상록수〉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선거 홍보 영상 때문이다. 한 시대의 금지곡이 느닷없이 국가적 캠패인 송으로 변신하는 놀라운 신분상승의 드라마는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친근한 모습으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무현이 눈물을 흘리는 선거광고물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노래 상록수〉.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경계에 있는 노래. 그 후 시민들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국민애창곡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서거하자 영결식이 열린 경복궁에서도, 노제가 열린 시청 앞 광장에서도〈상록수〉울려 퍼졌다. 그리고 떠나간 한 남자를 상징하는 노래로 변모했다. 그는 평소 <임을 위한 행진곡> <타는 목마름으로> <어머니> 같은 운동권 가요를 즐겼다. 그는 "독재 시절, 노래 때문에 용기를 갖고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대중가요도 잘 불렀다. <사랑으로> <작은 연인들> <부산 갈매기> 등이 애창곡이었다. 퇴임 후 봉하마을 관광객들 앞에서 밀짚모자를 T고 박수를 치며 구성지게 전통가요를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특히 〈사랑으로〉는 생전 노무현이 평소 즐겨 부른 곡이다. 그리고 한명숙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라고 울먹이는 조사도 귓가를 오래도록 맴돈다. 그리고 〈사랑으로〉가 다시 울려 퍼진다,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