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조건 없는 뭉칫돈 주나
비겁했다. “아내가 한 일이어서 몰랐다”는 발뺌은 옹졸했다.
말 바꾸기와 변명은 구차스러웠다.
아내는 안방에서 기업인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받았다.
본인이 실토했다.
그 돈 중 일부는 자녀 유학비로 썼다고 했다.
나머지는 빚 갚는데 썼다는 것이다.
아내는 이와 별도로 3억원을 더 받았다고 말했다.
남편의 회갑 때는 일 억원짜리 명품 시계 두 개도 세트로 받았다.
그런데도 남편은 “몰랐다”고 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거액의 검은 돈을 받아 아들 딸 유학비로, 빚잔치로 썼고 남편의 회갑선물로 고액의 시계를 받았는데도 몰랐다면 한 이불 덮고 자는 정상적 부부관계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편은 최고 권력자다. 최고 권력자의 아내에게 바치는 돈의 성격은 사실상 뇌물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기업인의 최고 덕목은 이윤추구에 있다.
그런데도 아무 조건 없이 10억원이 넘는 뭉칫돈을 ‘권력의 밥상’위에 올려놓고 “그냥 드시라니까요”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최고 권력자였던 남편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고도의 도덕적 의무를 지고 가족과 사회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할 국가 지도자의 처신은 아니다.
시장바닥에서 소매치기하다 걸려 든 잡범도 아니고, 참으로 궁색했다.
修身도 못했고 齊家도 안 돼
“모르겠다”는 남편의 말이 사실이어도 그렇다. 먼저 ‘부덕의 소치‘로 정리했어야 했다.
“내 탓“으로 가슴을 치는 일이었다. 수신(修身)도 못했고 제가(齊家)도 실패했으니 통절하게 참회했어야 했었다,
그래서 모든 잘못을 자신이 감싸 안아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엎드려 사죄해야 옳았다.
이는 범죄 성립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법리 공방의 증거채택 여부와 관계없는 일이다.
남편의 사법적 책임 여부에 관계없이 한 가장으로서, 국가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써 갖춰야 할 도덕적 가치요 의무인 것이다.
윤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아내라면 곤경에 처한 그의 허물까지도 기꺼이 껴안고 가겠다는 지아비의 최소한 정(情(정)이라도 보여줬더라면 이처럼 사회적 냉기(冷氣)가 빙점(氷點)을 맴돌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가 검은 돈을 받아썼다는 사실을 몰랐다거나 아들의 500만달러 투자 사실도 알지 못했다면 남편은 아내와 아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것이다. 배신을 당했다.
이래저래 남편의 처신은 고단하다.
타작마당 콩 타작 하듯
비겁하고 옹졸하기는 검찰도 마찬가지다.
사법처리는 법대로 하면 되는 일이다.
실체적 진실을 가려내고 법리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도 검찰은 ‘타작마당 콩 타작 하듯‘ 여론 재판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TV 연속 드라마 내보내듯 찔끔찔끔 피의사실을 흘리며 여론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이 피의자 소환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수사절차상 가장 중요한 신병처리 문제를 여론조사는 하고 다닌다“는 어이없는 말들이 돌아 다녔다.
오죽해야 검찰 내부에서까지 ”피의자 신병처리 문제를 차라리 투표로 결정하자“는 자조적 비아냥거림이 나오겠는가.
구속수사 여부의 기준은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는가’의 판단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고유권한을 여론에 물 타기 하려는 검찰총장의 ‘법치의식‘은 비겁한 것이다. 그리고 옹졸했다.
물론 나라의 품격이나 국가 신인도도 중요하다. 국민의 자존심도 있다.
최고 국가 권력자의 명예나 예우도 고려해 볼만한 사항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기소나 처벌의 판단기준이 될 수 는 없다. 판단 기준은 오르지 법일 뿐이다.
정치적 사회적 판단이 법적판단을 유린했을 때 검찰의 독립성은 백년가도 자기발로 일어설 수가 없을 것이다.
국민은 윤리적으로 비겁하고 옹졸한 남편도, 법치적으로 비겁하고 옹졸한 검찰권도 바라지 않는다.
돌팔매를 맞더라도 좀 더 당당한 처신이 보고 싶은 것이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