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름이 온 기분이다.
올 여름에는 여성들의 더욱 더 미니(mini)하고, 프티(petit)한 패션 아이템이 유행할 것이라는 신문기사다.
신세계백화점에서는 길이가 25cm인 손바닥 한 뼘 정도에 불과한 미니스커트 마케팅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이는 작년보다 5 내지 10cm가 짧은 것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여성들의 미니스커트를 보는 순간 저절로 흘깃거리면서 본다.
무릎위로 몇 센티미터를 넘게 올라간 짧은 미니스커트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로 하얀 속살의 아름다운 허벅지가 남성들의 시선을 잡고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여성은 그래서 싱그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미니스커트는 1960년 영국디자이너 메리퀸트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에 가수 윤복희 씨가 입은 뒤에 유행되었다고 한다.
내가 유년시절 장발과 함께 여성의 짧은 미니스커트가 죄였던 시절이이 있었다.
무릎위로 30cm 올라가면 구류에 처하고, 15cm 올라가면 경범죄(질서 벌)로 과태료를 부과했던 시절이다.
장발과 함께 미니스커트는 1970년대 저항과 단속의 대표적인 낱말이다.
패션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이 옷은 그자체로 사회와 문화의 원천이다.
심지어 정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한다. 요즘 여성들의 의상패션은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난해하다.
세계적인 패션회사들의 만드는 힙합룩(hiphop look), 빅룩(big look), 그런지룩(grunge look) 등등을 난해하다는 이유로 여성의 의상패션은 비즈니스 세상이지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안티패션(anti fashion)까지 등장하는 지금이다.
실로 다양한 패션으로부터 세상을 보고 느낀다.
그러나 미니스커트 패션은 평범한 남성들의 신선하고 맑은 향기를 느끼는 예술이다
지난여름에는 초등하교 교장선생님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의 하얀 다리를 핸드폰으로 촬영했다가 성폭행으로 고발되어 교장 직을 사임한 사건이 있었다.
미니스커트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것 이다.
사회를 맑게 하고 부드럽게 한다.
꽃이 사회의 아름다움에 기여하듯 여성의 미니스커트도 각박한 경쟁의식의 사회에서 서정과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제는 미니스커트에 대한 처벌의 유효기간이 경과 되고 보통 남성들의 지지를 받는 패선으로 완전 정착한 시대다.
그래서 미니스커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은 아직 유효하다.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난 미니스커트는 여성과 남성의 문제, 그리고 표현이냐 아니면 성을 매개로 한 상품이냐는 이슈(issue)문제, 드러내기와 훔쳐보기라는 욕망의 문제까지, 늘 논란이 대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국의 극작가 하니프 쿠레이시(hanif kureieshi)는 여성의 치마에 대하여 그의 저서 “친밀감(intimacy)"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실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선생의 다리를 훔쳐보려고 남학생들이 볼펜을 책상 아래로 던지곤 했다.
교육체제라는 것이 일관성이 없기에, 나는 여성들의 치마 속세계에 대한 불타는 호기심을 키워 갔다.
무엇으로 이루어 졌고, 질감은 어쩐지, 그 속은 물결은 치는지, 헐거운지, 팽팽한지, 어디 쯤 그곳이 있는지에 대서 말이다.
이후 극장 커튼이 그랬듯이 치마는 내 호기심을 건드렸다.
나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기다림이었지만 그건 가능성이 있는 기다림이었다. 치마는 장면을 전환시키는 물건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사물이면서 다른 어디론가 데려다주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중요한 지식에 대한 나의 이론체계다.
세계는 내가 들춰 보고 싶은 하나의 치마다.”<친밀감(intimacy) 이옥진 역, 믿음사>
우리들의 삶에는 여성의 치마 속 같이 알고 싶은 여백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가 될 것만 같다.
세상은 알지 못하는 곳이 있어야 그곳을 동경하며 삶이어지는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노출인지 훔쳐보기인지, 표현인지 상품인지, 작용인지 반작용인지 나는 명확히 구분 할 수 없다.
다만 쿠레이시처럼 들춰보고 싶은 여성의 치마는 모든 남성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기다림으로 남는다고 욕먹을 말을 하고 싶어지는 초여름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