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에 상(喪)을 당했다.
문상을 하는 신부(神父)가 제상(祭床)앞에서 기도를 마친 후 곧바로 삼배(三拜)를 하는 것이 아닌가.
유일신(唯一神)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천주교·개신교)성직자가 영정에 절을 하다니.
주재용 신부(1894~1975)가 펴낸『선유(先儒)의 천주사상과 제사문제』라는 도서를 읽고서야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이 서적은 머리말에서 1939년 로마교황청이 발표한 교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배공제조(拜孔祭祖)즉 공자를 배례하는 것은 그를 인간의 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것이요, 조상을 제례하는 것은 구복(求福)이 아닌 효도가 목적이다.
시대와 풍속이 바뀌고 있는 현시점에서 본다면, 이는 단지 선조에게 효성을 나타내는 민간의식에 불과하다.” 이로써 조상제사가 허용되었다는 것을 본 책자는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지침은 로마에서 열렸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당시 교황 요한23세는 가톨릭교회가 닫힌 문을 활짝 열어 변화와 쇄신을 도모하며,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이뤄내야 한다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타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하고, 교회의 토착화에도 관심을 갖도록 강조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그 정신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한때 개신교 목사가 성당에서, 천주교 신부가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중심에는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1921~1993)와 평신도 장일순 선생(1928~1994)이 있었다.
법정 스님도 타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이다. 이미 오래 전에 그는 우리나라 가톨릭의 본산인 서울 명동성당에서 설법을 한바있다.
그가 이 강단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주님의 그것과 동일하다”라는 내용의 종교적 진리를 설파함으로써, 신도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도 “기독교나 불교가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라고 곧잘 설명을 한다.
지난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유학자(儒學者)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김창숙 선생 묘역에 참배를 하였다. 2000년 5월의 일이다.
심산상(賞)을 수상한데 따른 답례로 그의 묘소를 찾아 유교예법으로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담담하게 심중을 털어놓았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꼿꼿한 선비로 훌륭하게 살다 가신 분에게 예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유교식으로 참례를 하든 불교식으로 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론은 이를 신선하게 받아들여 ‘가톨릭과 유교,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제목을 달아 큼직하게 보도하였다.
김 추기경의 타종교관(他宗敎觀)을 그의 회고록에서 살펴보자. “자기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법이다.
우상숭배 운운하며 특정 성화 또는 조형물을 파손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성화나 조형물은 숭배대상이 아니라, 매개체일 뿐이다.
상징물을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숭배’이지만, 상징물을 통해 그 대상을 기억하고 표양(表樣)을 본받으려는 것은 ‘예의’이다.
종교 상징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근원적 갈망의 발로(發露)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2009. 증보판).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현존하고 있다.
자신이 신앙하는 최고최상의 주(主)만이 오직 하나의 신(神)임을 확신하고 있는 신자들은 다른 종교를 선뜻 수용하기가 어려울 터이다.
하지만 수천 수백 년을 뿌리내려 오고 있는 고등종교의 실재(實在)를 업신여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김 추기경의 말대로 자기 것이 귀하면 남의 것도 귀하다.
순수한 종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도, 종교 간에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며 양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종교가 우리 인간세계에 사랑과 자비를 듬뿍 베풀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溪 山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