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를 처음으로 말할 때 내 심정은 약혼 받은 거러지 처녀 같은 상태였다.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부끄러움과 사랑과 곧음밖에 없는 모양으로, 아무것도 배우고 준비한 것 없이 역사를 가르치자고 교단에 선 나에게는 가진 것 있다면 믿자는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__넷째판에 부치는 말__)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함석헌의 명저이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그래서 민중이 점점 깨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약혼 받은 거러지 처녀'라는 시적인 표현은 논리적인 이론 전개를 대번에 뛰어넘어 한 역사가의 절박한 역사 위기의식과 고난의식을 명확하게 전달해준다. '과학적이려는 양심'이라는 표현 또한 근대과학문명과 종교사상의 갈등관계와 상충관계를 꼼짝달싹 못하게 압축시킨다.
그는 ‘바보새’이다. 그 역시 바보새를 좋아했는데 아마 그 이름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사는 모습 자체가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었다.
바보새는 새 중에선 따를 자가 없을 만큼 큰 ‘전설의 새’이다.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 몰라서 갈매기가 잡아먹다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산다.
그를 한국의 간디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민족의 큰 스승'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양식 있는 젊은이들은 그의 책에서 지성의 행로를 구한다. 그의 사상은 500년 후에야 널리 알려질 것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나는 고교시절부터 그를 좋아했다. 그가 대중강연을 하러 제주에 왔는데 군사정권의 기피인물인지라 그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고 하자 선배가 적극 말리던 생각이 난다.
〈씨알의 소리〉를 구하려고 고서점을 뒤지던 기억도 생생하다. 1980 광주항쟁 당시〈씨알의 소리〉는 두 번 폐간당하기도 했다.〈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 역사교육을 잘못 받았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가 주장하는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밑바닥은 고난이라고, 그는 일찍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서거 20주년을 맞았다. 올해는 그의 탄생 108주년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하여 그의 저작집이 출간되었으며, ‘함석헌 선생 탄생 108주년 기념 심포지엄’과 ‘낭독의 밤·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작년 7월에는 세계철학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한국의 철학’을 주제로 한 특별 심포지엄에서 그의 사상을 세계 철학계에 선보였다.
전국 200개 대학에 철학과가 있고 2500명의 회원들이 있지만 아직 우리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사상풍토에 그의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필화사건을 겪고 그는 20일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1973년 12월24일 YMCA회관에서 ‘현행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한 다음 유신을 철폐하라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전국민적 압박에 직면한 박정희는 마침내 74년 1월8일 유신헌법의 비장의 칼인 긴급조치를 선포한다.
그러나 긴급조치로도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유신반대 열풍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재사회 바깥의 빈 들에서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를 뱉어내었다.
그것도 그냥 빈 들인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영원 진리의 설교를 예비하고 있었다.
<사상계>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발표된 그의 산문들을 그의 운문과 대조하여 읽어보면 글맛이 완연 새로워지고, 대지성 함석헌의 인간적 풍모와 사회적 풍채가 입체적으로 부각된다. __고 그는 시인이다.
그냥 문단에 함몰된 시인이 아니라 예언자적 시인이다. 구약시대 예언자처럼 그의 언어는 늘 깨어있었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