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 지향’ 아닌 ‘존재 지향’
두 종류 사람이 있다.
'꽃을 보는 사람'과 '꽃을 꺾는 사람'이다.
보는 사람은 꽃을 보는 것 만으로도 좋아서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꺾는 사람에게는 꽃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게 아니다.
꺾어서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
‘에리히 프롬’은 꽃을 보는 사람을 ‘존재 지향’이라 했다.
꽃을 꺾는 사람은 ‘소유 지향’이다.
“현대인들은 점점 소유지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 프롬의 분석이다.
세상이 소유욕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뜻일 게다. 탐욕의 시대를 말함이다.
프롬의 ‘존재지향’과 ‘소유지향’은 그래서 비유하건데 ‘꽃밭을 가꾸는 사람’과 ‘꽃밭을 헤집는 사람’일수도 있다.
공의(公義)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과 사리(私利)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다.
어느 쪽이 세상을 밝고 건강하게 할지는 설명 없어도 분명하다.
프롬의 의도와 관계없이 ‘존재 지향’은 꽃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꽃씨를 틔우고 꽃밭을 일구는 사람이다. 이들은 향기를 나누듯 가진 것을 다스리는 데 조심스럽다.
‘소유지향’은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다. 가져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챙기려만 든다. 대개의 경우 마음속 악취가 예사롭지 않는 사람들이다.
공인의 작은 실천이 마중물
오늘은 ‘꽃을 보는 사람‘ 이야기다.
욕심을 걷어내고 공적 영역에 공의의 조그만 불씨가 되어보겠다는 사람이야기다.
어렵고 힘든, 그래서 더욱 삭막한 ‘가뭄의 시대’를 적셔 줄 한바가지 마중물이 될 수도 있겠기에 꺼내보는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 구성지 부의장. 그는 최근 부의장에게 책정된 국외 의정 연수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 했다. 지난해에도 그랬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이를 극복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서라 했다.
이것이 큰 도움이 안 되겠지만 공인으로서 작더라도 뭔가 해야 된다는 절박감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그렇다. 한 사람의 국외 의정 연수비 250만원은 지금의 사회적 국가적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의 말대로 ‘상징적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고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공인으로서 그의 작은 실천은 아무렇게나 폄훼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선되면 의정활동비를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선거 직들이 당선 후 입을 닦아 버렸거나 전기톱으로 민의를 토막 내고 쇠망치로 국회를 박살내다가 너도나도 해외여행에 올라탔던 국회의원들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共同善 엮는 사람들 이야기
하기야 전 재산을 내놓겠다던 대통령 까지도 뭉그적거리며 ‘게걸음’을 하고 있으니 누굴 빗댈 것인가.
그래서 구 부의장의 진정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도의원 해외 연수비 250만원 포기를 거창하게 포장 할 의도는 없다. 다만 작지만 공적인 기여를 하려는 그의 순수한 열정이 작은 불씨가 되고 들불처럼 번져 국난극복의 힘으로 작용되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의지할 곳 없는 장애인들을 모아 그들에게 재활의지를 심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생활수급자이면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 돌봐 줬던 경우도 한 둘이 아니다”.
국외 연수비 포기 보도 후 그이 지역구에서 올라오는 제보 내용은 그의 연수비 포기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일각의 질시와는 거리가 먼 진정성 있는 작은 실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거드름 피면서 집행부를 몰아세우기만 하면 척척 생활비가 나오고 일년에 몇 차례씩 해외 유람이나 다닌다“ 는 부정적 도의원 상(像)에 그래도 진정성을 갖고 의정활동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꽃을 꺾지 않고 꽃밭을 가꾸는 사람들.‘ 그들은 공동선(共同善)을 엮는 사람들이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