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분단에 묻혀진 천재시인
[세평시평] 분단에 묻혀진 천재시인
  • 제주타임스
  • 승인 2009.0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시인 이동순의 고백이다. 이동순은 시인 백석과 관련된 자야 김영한의 생애를 엮어서『‘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백석의 문학적 위치는 과연 어디쯤일까? 그리고 백석이 사랑한 자야는 누구인가?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이동순은『‘백석시선집』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자야는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자야로부터 백석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결국 자야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을 출간했는데, 이동순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시인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되었다

 일제시대 최고의 천재성을 인정받던 시인. 해방 후에는 남에서는 철저하게 묻혀졌으며, 북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시인.

남쪽에서는 단지 그가 해방 후 북쪽을 선택했거나, 북쪽에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단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으며, 북쪽에서는 사상성이 낮다는 이유로 기대만큼의 문학적 활동을 하지 못했던 시인.

그런 시인이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남쪽 독자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했으며, 많은 시인들이 백석에게서 영향 받았음을 시인하게 되었다.

남쪽에서 백석이 재조명되면서 북쪽에서 역시 백석이 뒤늦게 재조명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서 시인들이 최고로 꼽는 시집은 백석의 「사슴」(1936)으로 조사되기도 하였다.

계간『시인세계』는 김종길 김남조 홍윤숙 신경림 정진규 씨 등 원로부터 신진까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공개했는데, “지난 100년 간 나온 시집 가운데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큰 영향을 준 시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2명의 시인이 「사슴」을 꼽아 1위를 차지했다.

「사슴」은 바로 아이들의 눈을 통해 경탄의 시선으로 삶과 사회, 세계를 노래했다.

가난과 고독, 짐승과 귀신으로부터 받은 충격들을 친지와 이웃의 사랑으로 견뎌내는 아이의 세계가 담겨 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에도 『백석시선집』이 포함되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인 백석이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를 기리며 지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전문이다. 자야는 백석과 함께 만주로 갈 기회가 있었으나 망설이다 조선에 남았다.

자야는 해방 후 큰 요정을 경영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고, 자야가 흠모하면서 자신이 경영하던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절로 만들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기도 했다.

그 후 자야는 창비에 기금을 출연하여 매년 백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기리며 백석문학상은 수여되고 있다.

이처럼 창비는 현대문학사에 수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으며, 현재 한국문단에서 최고의 문학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발간되는 한 문학지가 창비에 대하여 평가절하는 이유를 필자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특히 생전의 자야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읽는 것이 가장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백석이 활동하던 1930년대는 한국의 시문학이 그 터전을 굳게 다지고 넓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백석은 어느 동인지에도 가담하지 않고 문학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독특한 시의 스타일을 견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시에서 고향의 풍토적인 자연과 인간의 가식 없는 삶, 민속과 속신 등의 다양한 것을 소재로 다루고 지방 토착어를 사용함으로써 촌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의 단면을 제시하며 자연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게 식민지 현실에서의 삶의 슬픔을 시화하는 시적공간의 확대를 가져오게 된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