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피어나는 작은 기적
‘레치암’. 히브리말이다.
‘삶을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한다.
‘레이첼 레멘’ 박사(샌프란시스코 의대 임상 교수)의 말이다.
그가 쓴 책 ‘할아버지의 기도(My grandfather's blessings)'에서다.
유년시절 외할아버지와 포도주를 마시며 건배 할 때 사용했었다고 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 뿐 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때론 부당하게 느껴지는 삶일지라도 삶은 여전히 거룩하고 서로 축복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레이첼 레멘’은 ‘마음과 몸의 조화를 이루는 건강법 분야’의 선구자다.
지금도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이면서 영혼의 아픔까지 치유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삶은 바로 그 자체가 축복’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고단하고 절망적이어도 누구에게나 이를 이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정신력은 사랑과 관심과 축복 속에서 힘을 얻는다.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 영혼의 울림을 통해 서로 만날 때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작은 기적들이 불꽃처럼 쉴 사이 없이 피어난다고 했다.
‘레치암’은 이런 삶을 위한 축복의 기도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인사가 넘쳐난다.
설 명절을 지내고 만나는 이마다 주고받는 덕담(德談)이다.
“건강하고 행복하시라“는 축복은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희망사항일 터이다.
건강을 위협하는 각종 질병인자가 삶의 주변에서 독을 뿜어내고 어렵고 힘든 절망적 상황들이 불행의 씨앗을 예고하고 있어서다.
이렇게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들이 희망을 노래하게 하고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는 덕담으로 일어서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뚱맞게 히브리말 ‘레치암’을 빌어다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절망적이더라도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의 삶을 축복해 주자는 뜻에서다.
그러면 서로가 짊어지고 있는 힘든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 질것이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이라 했다.
‘축복의 문’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마음에 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바로 거기가 축복의 문이다.
축복의 문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남에 대한 배려다.
이를 통해 함께 희망을 엮는 일이다.
항상 웃으면 언제나 웃을 일이 생기고 늘 감사하며 살면 감사할 일만 일어난다.
이는 신앙의 논리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체험적 경험담이다.
욕심의 거품 빼내는 리더십
다른 사람의 삶을 축복해주기 위해서는 내 욕심의 거품을 빼는 일이다.
공동체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 욕심만 챙기려 하다가는 서로의 축복은 고사하고 공동체의 기틀만 붕괴시킬 뿐이다.
특히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은 더욱 그러하다.
욕심의 크기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라진다.
‘시셉스키’는 미 듀크대학 농구감독이었다.
2004년 당시 모든 농구지도자의 꿈인 NBA 챔피언인 LA레이커스팀의 감독직을 고사했다.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안겨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이다.
“한 명의 선수는 단지 손가락 한 개에 불과하지만 다섯 명으로 뭉치면 단단한 주먹이 된다고 가르쳤던 당신이 가버린다면 듀크대 농구팀은 와해돼 버릴 것”이라는 제자의 e-메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욕심의 거품을 걷어낸 것이었다.
그 후 그의 농구팀은 승승장구였다.
약속을 지키는 리더십, 눈앞의 욕심을 버리는 리더십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예화다.
정말 힘든 상황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축복과 영혼의 울림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요령(搖鈴)을 흔들 수만 있다면 그래도 내일은 보다 희망적이지 않겠는가.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