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유람 떠나는 ‘망치국회’
국회의원들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거세다.
망치와 전기톱을 동원하여 국회를 무법천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여야가 줄줄이 어께동무하고 외유(外遊)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까스로 합의한 20여일 일정의 임시국회를 ‘빤짝 3일 국회’로 어영부영 때우는 시늉만 하고서다.
그렇지 않아도 ‘폭력국회’는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12일자 아시아판에서 이를 표지사진으로 실었다.
커버스토리를 통해 한국국회 극한 대치를 ‘아시아 민주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인용했다.
이처럼 국제적 조롱과 망신을 사고 있는 국회의원들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모르고 국민의 혈세로 대거 외유성 출장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여간 낯 두꺼운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아닐 수 없다.
국회의원이 아니고 ‘국해(國害)의원’이라 불러 마땅한 일이다.
억울하겠지만 외유를 가지 않는 의원들까지도 싸잡아 욕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네티즌들은 “299명 국회의원들이 몽땅 나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질타하고 있다.
“국민세금으로 배불리 먹고, 고급차 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고, 기물부수고 싸움질해도 면책특권으로 감옥갈 일 없고 심심하면 외국여행이나 즐기는 국회의원들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제욕심 위해선 ‘적과의 동침’도
‘퓨셰’는 파란만장했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였다.
끝까지 권력을 누리며 요리조리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교활하고 비열하며 배신을 밥 먹 듯 했던 ‘악덕의 덩어리’였다고 한다‘ 그의 전기를 썼던 ’슈테판 츠바이크‘가 평했던 바로는 그렇다.
‘츠바이크’는 그래서 “정치라는 세계는 정책을 갖고 정정당당하게 겨루는 전장이 아니라 오히려 요령 좋고 능청스러우며 간악한 술수를 부리는 자들이 살아남고 판을 치는 복마전”이라고 했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한다“, ”백성을 위한다“고 떠벌리면서 온가 술수와 선동과 모략과 당리당략(黨利黨略) 패거리 정치로 제 욕심만 챙기려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정치담론이나 다름없다.
여기서는 절차적 정의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와 우리만 있고 너와 너희들은 안중에 없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불법이나 행패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눈을 감고 불가피성을 되뇌면서 상대 쪽에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온갖 비난과 질시를 보내가 일쑤다.
그러면서도 제 욕심과 이익을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다.
국회를 파행으로 몰고 갔던 여야 국회의원들이 손에 손잡고 외유를 떠나는 꼴이 그렇다.
불량 정치인 ‘징벌장치’ 필요
이런 국회의원들을 아우를 만큼 국민은 너그러울 수가 없다.
그들의 철면피가 너무 가증스럽기 때문이다.
지금 방방곡곡에서는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당장 먹고 살려는 허기가 발등의 불이다.
그런데도 국민의 피땀으로 짜 올린 세금으로 외국 유람이나 즐기겠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물론 의원들의 해외의정활동은 국익차원에서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도 국내 의정활동이 떳떳했을 때의 이야기다. 국익을 위한 시대상황이 충족됐을 때의 일이다.
난장판 국회로 국정의 흐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해외여행을 나선다는 것은 아무리 너그러운 아량과 이성적 판단을 동원한다해도 이해 할 수가 없다.
엘리엇은 “이 세상 말썽의 대부분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에 의해 일어난다“고 했다.
그의 작품 ‘칵테일 파티’에서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런 정치인들에 대한 ‘징벌적 장치’가 마련되도록 공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는 정치인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국민이, 시민사회 단체가 나서 본때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가까스로 ‘청정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 터이다.
김 덕 남
主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