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경제가 불안하다.
긴 터널의 입구를 막 들어선 느낌이다.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방향조차도 잘 감을 잡을 수 없다.
국회에서는 같은 법을 한쪽은 악법이다.
한쪽은 민생법이다 하며 대판난투극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싸움을 말리면서 “여기가 국회냐? 싸움질하게” 한다고 한다.
이게 요즘 서민들의 느끼는 생각이다.
그러나 대다수 서민들은 살아야한다는 절대 절명의 현실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그 불안의 가장 큰 요인은 “불확실성”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측될 때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고나면 “반 토막 주식” “반 토막 아파트”가 되여 한숨으로 한밤을 지샌다.
대학졸업자 70%가 직장을 갖기 어렵고, 더구나 절반이 넘는 직장인이 감원공포에 시달리는 요즘이다. 요즘 신종용어인 “경제형우울증”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경제용어와 의학 용어가 합쳐진 이 말에서 지금의 우리 처지가 느껴진다.
이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우리는 이겨내고 견디어 내어야한다.
며칠 전 어느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기사 내용이다.
최근 손님이 크게 줄어들면서 식당운영이 힘들어지자 사장님이 고민 끝에 7명의 종업원 중 한명을 감원키로 하고 종업원끼리 상의해서 종업원 중 사정이 나은 사람이 그만둬 달라고 했다.
그중 나이 어린 막내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직원들이 서로 나서서 “우리들의 월급을 조금씩 줄여 함께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는 기사다.
낙엽같이 메마르는 나의 마음을 적셔주기 충분했다.
사람 냄새가 난다.
그런데 올해 한해는 이보다 더 어렵고혹독한 경제위기를 견디어 내어야 한다고 한다.
부지런히 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날벼락이다.
이들은 나라를 뒷받침하는 버팀목이다.
이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들은 열심히 일했어도 경기가 안돌아가니 자신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직장에서 쫓겨나고, 또 젊은이들은 부지런히 공부를 했어도 일터를 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지대로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무력감, 불안감, 불확실성, 이 모든 것이 뒤섞인 게 요즘의 신종용어인 “경제형 우울증”이다.
그러나 한번 바꿔 생각해 보자. 옛날로 돌아가 보자.
지금보다 훨씬 못살 때, 배고픈 것을 참으며 살던 보릿고개 시대에도 우울증이 많았다는 보고 자료는 없었다.
우리보다 더 못사는 나라사람들의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아서 우울증으로 불행하다는 통계도 없다.
그렇다면 경제상황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건 바로 스트레스를 받아드리는 우리들의 자세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늘 최상의 상태에 있고자하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이걸 “항상성”이라고 한다.
이 항상성을 깨는 모든 자극과 변화가 스트레스인 셈이다.
우리지역의 원천 소득인 관광과 농업은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더욱 가혹한 스트레스 일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 스트레스보다 더 무서운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
그것은 절망이다.
우울증에 걸리는 심리 기제 중 가장 핵심이 절망인 것이다.
지금의 “전 국민적 우울증”을 예방하고 극복하는 일은 이외로 간단 할 수 도 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길은 도망치거나 맞서는 거다.
도망가는 것은 삶의 포기다.
삶을 포기 할 수 없다면 맞서는 거다.
현실 있는 그대로 견디고 이겨내어야 한다.
올 한 해 동안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자신만의 생활리듬을 잃지 않아야한다.
오늘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어 내며는 머지않아 지나간다.
현재는 언제나 서러운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다.
이모든 상황은 분명히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다.
앞서 소개된 포털 사이트 기사가 한 작은 식당의 일이 아니라 사회전체로 확대 되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 십시일반 조금씩 자기 몫을 나누어서 나라의 어려움도 덜고 누구도 일자리를 잃지 않아 “서로 가슴 아픈 일”을 겪지 않도록 견디고 이겨내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