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남 칼럼] “다시 희망을 노래하자”
[김덕남 칼럼] “다시 희망을 노래하자”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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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것 없이 잃어버린 1년

 한해가 저물었다. 희망을 이야기하며 출발했던 때가 엊그제였다. 그런데 벌써 세밑이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아득바득 이 악물고 달려왔지만 이뤄놓은 것 없으니 더욱 ‘무정세월(無情歲月)이다. 얻은 것 없이 잃어버린 1년이었다.(는 이들이 많다).

 지난해 연말에는 많은 이들이 희망을 노래했었다.

새 정부에 대한 기대도 한몫이었다.

  그래서 매년 연말 사자성어를 통해 시대상황을 압축해 냈던 교수신문에서도 기대를 담아냈었다.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광채, 깨끗한 바람, 그리고 비갠 후의 달빛’이라는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되돌아본 지난 1년은 회한(悔恨)뿐이었다.

아쉬움과 상실감의 점철이었다.

절망적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예의 교수신문의 2008년 사자성어는 호질기의(護疾忌醫)라 했다.

“병든 것을 알면서도 고치려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치가 고질(痼疾)이었다.

경제는 심각한 빈혈증상이다.

쓰러질듯 휘청거리고 있다.

민생은 빈사상태다.

 그런데도 국회는 망치와 전기톱으로 국정을 난도질 하고 있다.

국민을 위한 국회가 아니다.

나라를 작살내 해치는 국해(國害)조직이요 국가에 해가 되는 국해의원(國害議員)일 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렇다고 절망을 노래 할 수만은 없다. 지난날이 아무리 어둡고 칙칙했다고 해도 태양은 언제나 새로운 빛으로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일찍이 러시아 시인 ‘푸쉬긴’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노래했다.

‘절망의 날을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온다’고도 했다.

 그렇다. 푸쉬긴의 노래처럼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 함이다.

현재가 슬프고 모든 것이 한 순간 사라져버리지만 가버린 것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희망의 불쏘시개가 된다는 것이다.

 세월은 사람의 손으로 붙잡을 수 없다.

스치는 바람을 움켜쥘 수 없고 햇빛을 손아귀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다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지혜를 짜 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역사의 교훈을 말함이다.

 지난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혹독하게 추웠고 캄캄한 절망의 밤이었더라도 거기에서 따뜻한 마음을 엮어내고 희망의 빛을 골라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가 아니다.

 2008년의 절망적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통증으로 다가서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되뇌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남은 ‘판도라의 희망’

 뚜껑열린 ‘판도라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이 세상을 휘저어도 상자 속에 마지막 남은 선물은 ‘희망’이다.

 절망보다 무서운 건 희망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라 했다.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 부단히 몸부림 칠 때라야 절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내일이면 묵은해가 간다. 역사의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세월을 붙잡아 두려고 발버둥 쳐도 무심한 세월은 사람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서두름도, 게으름도 없이 항상 같은 속도로 오가가는 것이 세월이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 빠르기도 하고 느리다고 생각 될 뿐일 것이다.

 당(唐)대 말기  학자이자 시인인 서현(徐鉉)은 세월에 대한 사람의 감정을 시로 엮어 낸바 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겨울밤 등잔불은 잠 못 이루 듯 깜빡이고(寒燈耿耿), 새는 세월은 더디기만 한데(漏遲遲),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 일은 어김이 없구나(送舊迎新了不欺)‘.

 어김없이 가고 오는 세월, 가는 해를 잘 보내고 오는 새해를 잘 맞이하는 것도 덕(德)이요 삶의 지혜일 것이다.

김  덕  남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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