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할아버지의 소망
[세평시평] 할아버지의 소망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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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수많은 위인전기들은 국내외 인물을 막론하고 거의전부가 남성위주로 되어있다.

그러면서도 같은 남자인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한 기술(記述)은 대단히 인색한 편이다.

오히려 어머니에 관한 서책들이 다수이고, 할머니에 대한 글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칭송하고 사모하는 일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당연하다 하겠지만, 아버지·할아버지를 다룬 도서들도 더러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간혹 아버지에 대한 서적은 출판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할아버지와 관련된 책은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할아버지 이야기’를 쓴 좋은 글을 접할 수 있었다. 번역서이긴 하지만「할아버지의 기도」와「할아버지의 축복」이라는 두 책이다.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잔잔하게 펼쳐지며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내용이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흙이 담긴 조그만 그릇을 주시며 “매일 이 그릇에 물을 조금씩 주어라”고 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날마다 물을 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길까하는 호기심도 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릇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주가 되자, 물을 주는 일이 무척 따분하게 여겨졌다. 할아버지에게 물을 주지 않겠다고 짜증도 부렸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그래도 물을 주는 것을 거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주가 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깜빡 잊을 뻔 했다가 물을 주려는데 그릇 안의 흙에서, 움트고 있는 연두색 싹을 보게 되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 할아버지는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에도 생명은 숨어있는 법이란다.” “그럼,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은 물인가요?”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인내와 성실이란다.” 이 가르침은 바로 할아버지의 소망이자, 기도요 축복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돌아가신지 이미 오랜 할아버지 생각이 간절하였다. 할아버지는 우리 나이 예순여섯 살에 운명하셨다. ‘조부 위독, 급거 귀가바람’이라는 짤막한 전보에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왔다. 끝까지 고통을 참으며 손자를 기다리셨던 할아버지는 “네가 왔구나. 고맙다. 군율이 엄하기로 유명한 해병대에서 너를 이렇게 빨리 보내주다니.” 잠시 말을 끊으셨던 할아버지는 “장사는 다른 가족들이 치를 수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말고 귀대해서 군무에 힘써라.” 그토록 보고 싶던 장손을 만난 지 두 시간도 채 되기 전에 조용히 눈을 감으시며 하시는 말씀은 “국토방위의 임무”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바랐던 마지막 소망은 과연 이 한마디밖에 없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단 하나인 손자가 아버지 없이 자랐기는 했어도 장차 ‘훌륭한 사람’이 돼서, 선대에 못 다한 ‘일들’을 이루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을 터이다. 

 할아버지는 평소 관대하면서도 엄격하게 훈도하셨다. “공부에 앞서,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웃어른을 만나면 공손히 인사를 드려라” “나무를 심고 잘 가꾸어라” 등등. 당시는 매우 어렵게만 느껴졌으나, 차츰 자애지정(慈愛之情)의 엄교(嚴敎)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손자에게 따뜻한 가슴으로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셨던 할아버지. 이제는 모든 걱정을 거두시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셨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4341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황혼기의 할아버지·할머니들께,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시길 진심으로 기원 드린다.

溪 山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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