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지역의 평화 정착을 위한 분야별 평화실천 방안 마련 및 권고와 국내외 홍보 등의 사업을 하고 있는 세계평화의섬 범도민실천협의회(의장 송봉규)가 실시한 히로시마 탐방행사에 참여하여 히로시마의 평화사업이 제주에 주는 함의가 무엇인지 숙고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폭발하였다.
1945년 말까지 대략 14만 명의 인명이 손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잔혹한 무기를 경험한 히로시마 지역의 사람들은 항구적인 세계평화의 실현을 호소하는 평화활동을 확산하고 있다.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폭발한 핵폭탄은 순식간에 히로시마를 초토화시켰으며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히로시마사람들은 신체적인 장애와 후유장애에 대한 공포 등의 경험하게 되었다.
히로시마시는 주민투표를 거쳐 최초의 특별법인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건설법”을 제정 공포하고 평화기념공원과 제반시설을 건설하였다.
1952년 8월 6일에 “원폭사망자 위령비”가 제막되었다.
2살에 피폭 당한 사사키 사다코양이 12살에 백혈병에 걸려서 건강을 회복하려는 염원으로 종이학을 접다가 1995년 10월 25일 숨졌는데 전국각지에서 성금을 모아서 1958년 5월 5일에 “종이학의 탑”이라고 부르는 “원폭의 어린이 상”을 건립하였다.
모토야스가와 강변에 위치하고 있던 “히로시마현 물산진열관”으로 사용하였던 돔형 건물이 기적적으로 붕괴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원폭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내외의 성금으로 1967년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1989년에 두 번째 보수공사에서는 전 세계에서 성금을 모금하였다. 1996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다.
이러한 히로시마 지역 사람들에게도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미미하며 가해자인 일본을 은근히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에는 위령비에 새겨진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비문을 훼손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비문은 희생자나 그 유족인 히로시마시민이 “잘못”을 범해 사죄하고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잘못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비문을 훼손하였으나 현재는 비문이 원상복구되어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
반핵운동을 하는 평화운동가들이 몰려들고 일본의 학생들이 전국에서 견학을 온다.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과 세계문화유산인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신사와 연계되어 히로시마는 관광명소로도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참혹한 핵폭탄의 피해를 딛고 히로시마의 번영을 구가하는 평화관광의 명소로 히로시마를 발전시키는 데는 시민들의 기여가 매우 컸다.
히로시마평화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100여명의 임직원의 2/3이 히로시마현청에서 파견 된 공무원이다.
그러나 평화기념자료관에서 해설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자이다.
히로시마미술관의 입장료가 천 엔인데 반하여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의 입장료는 오십 엔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담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핵의 참상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한 조치이다. 민이 주도하고 관이 협력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8월초 반핵평화 행사가 집중적으로 개최되는 기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이 평화운동가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번영시키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시민들은 부수적 효과로 경제적인 풍요를 얻고 있는 것이다.
숭고한 이념을 떠나서 실용적인 관점에서만 본다고 해도 제주도를 세계적인 평화의 섬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탐방으로 다시 느끼게 되었다.
어떤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세계인이 제주를 평화의 성지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한다.
강 병 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