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에 아침운동으로 사라봉에 갔다가 첫눈을 맞이했다.
사라봉의 노송과 벚나무 숲 사이로 오는 싸락눈은 제주항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과 함께 사랄봉의 아침은 삶에 버거운 도시인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데 충분했다.
바다의 파도 바람과 싸락눈빨, 노송의 자연소리, 옆 도량(소림사)에서 들여오는 종소리는 자연의 원색 그대로다.
나는 며칠 전부터 첫눈을 기다린 것이다. 물론 첫눈만이 아니라 처음 시작되는 것을 기다려지는 천성이 있다.
첫 출근, 첫 만남, 첫 키스. 첫 날밤, 등등 처음 접하는 모든 것은 설렘과 소망과 바램을 가질 수 있지만, 첫눈만은 모든 생명들의 혹한의 고통을 바램과 소망으로 견디는 초심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소망과 바램은 오늘 사라봉에서 첫눈 같은 혹독하고 질곡이 있는 공간에서만 탄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둡고 춥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만 한(恨)이라는 생명력의 혼(魂)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사라봉 산책로에서 한겨울을 견디는 한 그루의 수선화도 생의 질곡을 한으로 받아드리고 고통을 희망으로 바뀌는 갱생과 부활하는 삶이리라.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의 한의 생명력인 것이다.
한(恨)의 생명력이라는 것은 불가의 불화 해설에도 있다.<화엄경> 이 불화(觀音幀畵)에서 상서롭고 운이 좋아진다는 길상(吉祥)무늬는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의 한에 대하여 깊은 연민과 간절한 소망을 담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스스로 성불(成佛)을 유보하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보살행(菩薩行)의 최고경지로서 관음을 그린 길상의 의미라는 것이다.
중생의 한과 신음소리를 자신의 숙명으로 껴안고서 다함께 구원 받는 것, 즉 근원적 생명력에 대한 공동의 깨침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한다.<관음탱화해설>
초겨울의 첫눈은 혹독한 삶의 질곡에서 한으로 지탱하는 생명력의 계절이다.
초겨울은 낮고 어둡고 쓸쓸한 곳에서 한으로 지탱하는 생명들에게 사랑과 따듯한 정을 위한 기도를 하는 계절이다.
1등처럼 당당하고 충만한 승리자의 등 뒤에서 2등처럼 날개를 접은 작은 한 마리 새가되거나, 윤회의 간격 때문에 무릎을 꿇고 한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아니 초겨울 같은 그늘진 곳에서, 승리자의 등 뒤에 사는 한의 생명력에게 동반의 마음을 보내어야한다. ‘등 뒤의 사랑’을 뒤돌아 봐야한다.
승리자들은 맹목에만 눈멀어 앞만 보고 온몸으로 덜려왔기에 그동안 자신의 등 뒤의 사랑에 대해서 무심 했는지도 모른다. 등 뒤에서 누가 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첫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추위 속에서 문득, 그렇게 문득 등이 굽어지며 결락의 상처가 아득히 시릴 때 그곳 등 뒤를 돌아보는 천성이 있다.
어느 시인은 ‘그리운 것들은 다 겨울 같은 음지의 등 뒤에 있다’고 했다.
등 뒤, 그곳은 따뜻한 소망의 샘터 같은 그리움이 있는 곳이다.
늘 햇살이 머물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따뜻한 그리운 양지바른 곳으로 가는 길목이다.
당신은 누군가를 등 뒤에서만 바라보면서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그 등이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약속도 없이 한으로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등 뒤, 그곳은 한의 맺힌 응달이다.
등 뒤의 사랑, 그것은 뼈와 피가 시리도록 아픈 사랑이다. 초겨울에는 등 뒤에서 우는 흐느낌 소리를 들어야한다.
많은 날을 혼자 숨죽여 한을 울었던 누군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야한다.
눈 오는 사라봉의 아침 숲의 어두운 그늘에 숨어, 혀를 깨물며 울고 서있는 소나무, 왕 벚꽃나무 같은 그 영혼에 무릎을 꿇고 경건해 져야한다.
누구에게나 누군가의 등 뒤만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불 꺼진 가로등 뒤에 숨어서 한 연인의 등만 지켜보던 유년 시절이 누구에나 있다.
등 뒤의 님은 연인이라도 좋고, 능력이라도 좋고. 가족의 건강이라도 좋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이룰 수 없는 능력, 같이 생존 할 수 없는 삶의 유한성 때문에 한으로 사는 것이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삶의 한계, 등등 사랑하는 사람의 등 뒤는 그건 길이 아니라 끊어진 절벽이다.
삶이라는 것 은 뛰어 넘을 수도 없고 오를 수도 없는 깊이와 높이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는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이다. 삶의 여정은 한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