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전 상서
어머님 전 상서
  • 조정의 논설위원
  • 승인 200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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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올해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추석은 찾아왔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게 하도 을씨년스러워 추석을 맞는 마음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명절은 지내야지요. 작년만 해도 추석 차례상 차리는 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마는 올해는 사정이 예년 같지 않다고 입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머님 살아생전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날 옥돔으로 갱(羹)을 끓이고 늘 하시던 대로 시들시들하게 가을볕에 말린 옥돔을 고소하게 구어 차례상을 차려야 되는 것을 이 아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어머님이 손수 손보시던 ‘당일바리’ 옥돔은 올해 따라 구경하기가 쉽지 않고 지천으로 좌판에 벌려 있는 게 중국산 옥돔이라 하더군요. 마음만 먹으면 ‘당일바리’ 옥돔 몇 마리를 못 구하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당신 며느리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여 ‘당일바리’ 옥돔 파는 가게 앞을 모르는 척 지나치고 말았답니다. 옥돔 몇 마리가 그렇게도 비쌌을까.

  그 옥돔가게 앞을 슬쩍 지나친 게 어디 당신 며느리뿐이었겠습니까. 다른 며느리들도 ‘당일바리’ 옥돔을 파는 가게 앞에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이렇게 어려워졌습니다. 우리야 뭐 아는 게 있습니까. 중국산 옥돔이라고 써 놓고 파는 가게는 한 곳도 없는데 값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니 중국산으로 짐작할 뿐이지요. 모양도 같고 색깔도 비슷하여 얼른 가려내기가 쉽지 않는 게 중국산 옥돔이지요.

   오래 전, 그러니까 한 오십년이나 지난 세월이 이야깁니다. 어머님은 밭에서 일을 하시다가도 멀리 비양도(飛揚島) 동녘 끝자락에 돛단배 한두 척이 모습을 드러내면 일손을 놓고 그 범선(帆船)들이 돛을 내리는 포구로 줄 다름을 치셨지요. 내일 모래 다가오는 추석 차례상에 올릴 옥돔을 구하러 갔던 것임을 잘 압니다.

며칠 전부터 미리 약속을 해 두었던 옥돔 몇 마리를 ‘구덕’에 넣고 집에 와서 정성 드려 옥돔을 손보시던 어머님 얼굴이 아련합니다.
   이 아들이 장가를 들어 기일 제사를 차리기 시작했을 때, 그 때의 살림살이는 지금 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도 제사상에만은 ‘당일바리’ 옥돔을 올려야 된다고 새 며느리에게 당부하시던 당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철이 들 만했을 때 어머님은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음력 삼월 스무 날께, 할머님 기일에 쓸 옥돔을 보름 전에 부탁을 해 두었는데도 그 봄엔 연일 파도가 드세어 포구에는 기다리던 옥돔은 나지 않고 팔뚝 보다 더 굵은 ‘복쟁이’만 지천으로 널려 있더라고 하셨지요. 당신은 거저주다 시피 값이 싼 ‘복쟁이’를 한 ‘구덕’ 사고 와서는 묵은 김치에 처마 밑, 응달진 곳에 자라는 양하의 새순을 따다 끓였다지요. 밥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아마 그 때가 춘궁기(春窮期)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리이삭이 익으려면 아직도 달포는 좋이 있어야 되고, 보리쌀 독은 비어 있었던 게 집안 형편이었겠지요. 어머님은 큰 맘 먹고 우리에게 ‘복쟁이’를 먹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곳곳에서 ‘복쟁이’를 먹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 때라, 당신은 아이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복쟁이’를 먹은 날 밤엔 자다가도 몇 번 씩 자는 아이들의 코에 귀를 대 보았다는 말도 들려주셨지요.

잠시 잠든 사이에 아이들 숨이 멎기라도 한다면…. 어머님이 그렇게 가슴 조이며 우리에게 양껏 먹였던 ‘복쟁이’가 지금은 금값입니다. 아마도 ‘당일바리’ 옥돔 보다 값으로는 한 수 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님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던 ‘복쟁이’는 이제 서민들은 입에 댈 엄두도 못내는 귀하신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님, 세상이 이렇게 많이 변했습니다. 내년에는 경제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 대통령도, 장관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만 언제는 내년에 못 차릴 제사 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나저나 내년에는 ‘베지근’하게 ‘당일바리’ 옥돔으로 갱을 끓여 차례상을 차리겠습니다. 올 추석 차례상이 부실했던 것에 대한 노여움일랑 용서하시고 내년 추석에는 ‘당일바리’ 옥돔 국이며 가을볕에 시들시들하게 말린 옥돔구이를 부디 흠향(歆饗)하소서.

수필가  조  정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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