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위한 변명
‘전통’을 위한 변명
  • 강정홍 논설위원
  • 승인 2004.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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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개발은 우리의 사회적 과정을 담아내는 양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국제자유도시’에 대해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 화려한 구호 아래 매몰된 전통적 삶의 운명을 보았는가.
전통에 관한 물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발의 어휘들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나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시간과 장소를 하나의 위기로 진단한다. 이러한 위기는 개발의 어휘들이 우리의 삶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거기에는 화려한 구호만이 난무할 뿐이다. ‘국제자유도시’가 되면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허구적 믿음이 우리의 실존을 지배하고 있다.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전통마저 낯설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분명 ‘하강하는 삶의 징후’다. 자신 속의 무궁한 생명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그것도 모른 채 방황하는 그곳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읽는다. 과거보다 풍요롭게 산다고 하여 오늘의 우리 사회의 건강성이 과연 옛날보다 좋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전통의 해체는 고통을 준다

지역사회라고 고정 불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지역주민 역시 사회발전에 조응하여 그 존재방식을 새롭게 한다.
뱀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때그때 허물을 벗듯이, 인간도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동안 고수해왔던 전통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하나의 전통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것은 얼핏 지조 있게 보일지 모르나, 그러한 사람은 성장을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아니, 성장을 멈춘 인간으로 봐야 한다.

지역사회도 마찬가지다. 영속적이고 고정된 어떤 특질에 집착하는 지역문화는 그 지역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는 증거이다. 문화적 배타주의는 약함의 증표이다. 자신감의 결여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이익과 관련된 범위 안에서만 바깥세계에 관심을 갖는 문화적 국지성이 얼마나 역작용을 빚어왔는지 나는 모르지 않는다. 자기 충족적 폐쇄회로에 빠지면서 스스로를 상대화할 여유를 갖지 못할 때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전통의 해체는 고통을 주지만, 그러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준 높은 지역문화를 건설하려고 할 때, 전통이 해체된 시대에 긍지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외면하지 않는다.

자명한 것은 삶의 전통일 뿐

그러나 전통은 뿌리라는 의식과 연결된다. 뿌리 의식의 상실은 자기 부정이다. 우리의 뿌리 의식에 공유된 의미를 정립하자는 것, 그것이 바로 여기서 강조하는 전통이다. 거기에 웬 의미냐고 되물으면 나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미는 바로 주변 맥락과의 배치관계에 따른 효과가 아니던가. ‘제주사람’이 ‘제주’라는 자연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지혜로 엮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설명돼야 할 대상이지, 해답을 제공하는 시공간이 아니다. 비록 비합리적이지만, 자명한 것은 삶의 전통일 뿐이다. 그것은 현재의 실존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개발의 홍수 속에서도 지역사회 스스로 전통을 지키는 보존력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사회는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관료적 합리성만을 추구한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비용과 이익에 관한 명시적 또는 함축적 결과만을 구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전통의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전통의 가치는 우리의 결정에 의해 창조된다.
그래서 나는 단언한다. 전통의 실종이 우리의 실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라면, 나는 그 어떤 시책에도 과감히 반대한다. ‘공허한 열망을 가진 낭만주의자’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화려한 구호에 마비되어 그 폭력성에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되는 것은 무능력일 뿐이다.
자존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자화상의 문제다. 홀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또 다른 약함의 증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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