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몽양과 고경흠, 그리고 강재언
[세평시평] 몽양과 고경흠, 그리고 강재언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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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극좌가 아니다. 더욱이 나 같은 몽양계 중도 진보는 극좌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스물세 살 때 이미 몽양 여운형계로 사상 편성을 마쳤다. 저희들이 허상을 만든 것이다. 감옥 안에 앉아서도 저희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시인 김지하(金芝河)는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계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돌을 던진 극좌 세력에 섭섭함을 나타내었다. 그가 진보 중도인 몽양에게 사상편성을 마쳤다면, 우리는 다시 몽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양은 정부가 수여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도 받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피격될 당시 제주출신 고경흠(高景欽)이 그 옆자리에 있었다.

몽양 여운형은 누구이며, 왜 피격되어 사망했는가? 몽양은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괴한에 피격되었다. 그 때까지 수많은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날 하오 1시 몽양이 탄 차가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트럭 한 대가 달려 나와 몽양 차를 가로막았고, 차 속에서 몽양과 신변보호인 박성복과 고경흠, 그리고 운전수가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두 발 총소리가 나면서 몽양은 풀썩 쓰러졌다. 몽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만 사람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왜놈도 못했거늘 어째 선생을 죽였느냐?” “선생의 피와 함께 인민은 살아 있다!!” “아! 우리의 지도자 몽양 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혁명에 흘리신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 있나니… 반동의 총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위대한 죽음을 슬퍼하는 이 노래! 몽양의 유해를 둘러싸고 젊은 청년들이 흐느껴 운다. 고히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 갚으오리다. 몽양 선생 추모의 노래는 오고가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그렇다면 몽양 여운형을 누가 피격했는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좌우합작’에 큰 불만을 가졌던 한민당 일파의 소행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범인 한지근(韓智根)이 몽양이 탄 자동차 앞 뚜껑 위로 올라가 권총 두 방을 쏘았다. 그는 백의사(白衣社) 멤버였고, 백의사는 1945년 월남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반공주의적 청년단체였다. 몽양의 죽음 이후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감으로써,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은 현실화되었다.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1945년 12월 ‘선구회’라는 우익단체에서 여론조사를 했다. 당시 조선의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의 응답이 나왔다. 또 조선혁명가를 꼽는 항목에는 여운형 195표, 이승만 176표, 박헌영 168표, 김구 156표, 김일성 72표가 나왔다. 그렇다, 사람들 가슴에는 몽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또 주목할 사람은 몽양을 따랐고, 몽양 옆에서 죽음을 목격한 제주출신 고경흠이다. 그는 독립신보 주필이며 건국준비위원회 간부였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보성전문학교를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재동경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일본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하고, 신간회 동경지회에 가입하기도 했으며, 이 무렵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며 몽양과 가까워졌다. 1946년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呂運亨)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최고 수뇌부와 회담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월북하여 조선노동당 중앙후보위원이 되었으나, 1963년 숙청되었다.

또 있다. 제주출신이며 현재 일본 하나노조대학 객원교수인 강재언(姜在彦)이다. 1970년대와 80년대 ‘시대를 고뇌했던’ 세대에 속하는 이라면 강재언이란 이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몽양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창당 관련 학생운동도 서울에서 했고, 4·3 때는 고향 제주로 가려 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 우익 서북학생연맹에 찍혀 명동거리에서 직접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몽양 여운형은 진보적인 제주 출신과 갚은 관련을 갖고 있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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