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일요일이면 식구들 몰래 교회에 나갔다.
특히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이유가 있었다.
4ㆍ3당시 토벌대는 운동장에 사람을 모아놓고, 경찰가족과 군인가족과 그리고 교인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그 때문일까? 제주본토박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드물다.
서북청년회에는 일부 친일 감리교 세력이 끼여 있었다.
일제는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그들은 모금운동으로 전투기를 헌납하고, 신사참배와 황국군대 지원에 앞장섰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그래서 남한으로 내려와 서청에 합류했다.
그래서 일부 감리교회에는 서청출신이 많았고, 그들이 만든 교회도 있었다.
지금도 일부 보수교단에서 국가보안법에 민감하고, 반공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라소니 이성순 서청간부도 후일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안두희도 서청간부로 김구 암살에 관여했다.
서청은 1946년 11월 30일 조직된, 북한에서 남하한 극우단체이다.
그 후 3ㆍ1절 ‘남대문충돌사건’을 비롯하여 ‘부산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사무실점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사건’ 등 좌익에 대항하는 테러를 전개했다.
그래서 ‘백색 테러단’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그들은 3·1사건 이후 제주도에 파견되었고, 본격적인 진출은 4·3직후였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 직후인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에도 그들이 개입하였다.
서청 제주도지부는 1947년 11월 2일에 결성되었으며, 조선의 국제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들을 제거한다는 행동 지침을 세웠다.
제2대 도지사 유해진이 경호원 자격으로 서청회원을 데리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발족되기 이전부터 적지 않은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켰다.
그들 가운데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생활에 쫓기다보니 처음에는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에 따라 4·3진압 요원으로 500명이, 여수·순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서 12월까지 두 달 사이에 1,000명 이상이 진압 작전에 뛰어들었다.
4·3사건이 발발하고 강경 진압이 지속되던 1948년 11월 9일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이 서청 사무실에서 고문을 받고 살해되는 사건도 있었다.
또한 당시 유일한 일간지였던 『제주신보』를 강압적으로 접수하여 운영하는 등 그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그들은 경찰은 물론 군인으로도 변신하였다.
그들의 지원세력은 물론 미군과 이승만이었다. “제주도의 서청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는 미군 정보보고서의 기록도 있다.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증언을 통해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이다.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해명성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렇듯 그들이 도민에게 남긴 상처는 악몽 바로 그것이다.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은 ‘한국근현대사’를 통해 4ㆍ3을 ‘반란(叛亂)’으로 규정했다.
반란이란 ‘정부에 대항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제주4ㆍ3이 반란이라면 ‘정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1948년 4월 3일은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이다.
4ㆍ3은 3ㆍ1발포사건에 대한 미 군정청과 서북청년회의 가혹한 탄압에 대해 제주도민들이 반기를 든 사건이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