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생각 바꾸기
[세평시평] 생각 바꾸기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0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곁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자꾸 훌쩍이며 울더란다.

딱해 보이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서 ‘왜 그러느냐’ 물었는데, 그분의 대답인즉,  “내가 아들이 다섯에다 자가용이 다섯 대나 있는 어미요. 헌데 날 병원에 대려다 줄 놈이 하나도 없소 그래 속이 상해서 이러는 게요.” 하자,

“그래요 화가 나게 생겼소. 그래도 아직 두 다리 성해서 걸어 병원에 왔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남의 손에 의지해서 병원에 실려 올 때는 이미 다된 목숨 아니겠소? 그러니 화 풀고 우리 행복하다고 생각합시다.”

가만히 듣던 노인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말도 맞아 보이네.’ 하며 얼굴을 펴더란다. 이튼 날  그 할머니를 다시 만났는데, 가까이 오며 하는 말이

“우리 영감이 어제 그 말을 듣고서 고맙다고 점심을 산답니다. 같이 갑시다.” 했다는 것이다.

영감님이 고마워서 점심을 사겠다고 까지 했다면, 평소 마누라의 불평에 꽤나 시달려 왔다는 상상이 가능 해진다.

“내가 지들을 어찌 키웠는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불만이 많았으리라.

끊임없이 불평을 말하는 사람 곁에서 산다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을 바꾸도록 도와 준 사람이 남편으로서는 대단히 고마웠으리라.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서 자가용을 굴릴 만큼 독립시켰다면 할머니는 자식을 잘 키우셨다. 아들들은 각기 사회의 한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터이다.

얼마나 바빴으면 노모를 병원에 태워드릴 시간조차 낼 수 없었겠는가.

세상에는 다 늙은 부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철 안 든 자식들도 적잖이 있는데, 건강하게 활발하게 제 몫의 삶을 사는 자식들이라면 설사 부모를 극진히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초적으로는 효자이다.

더구나 사려 깊은 영감님도 곁에 있으니, 할머니는 다복하신 분이다.

 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지 더 바란다면 심기가 불편해질 뿐, 피차에 득이 될 수가 없다.

 여건이나 상항이 인간을 지배하는 거라고 믿기가 쉬운 데 사실은  생각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다. 한 부잣집에서 며느리 구한다는 광고를 내고 쌀 닷 되와 나무 한 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한 처녀는 쌀과 나무를 서른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껴먹으려 노력하다 안 되니 도중 탈락했다.

 다른 처녀가 와서는 불 따듯이 지피고 밥 한 솥 지어 잘 먹고는 하녀를 시켜 바느질감을 구해 오도록 부탁했다. 삼십일 내내 바느질 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넉넉하게 한 달 살고도 쌀과 나무를 처음보다 더 많이 남기더란다.

같은 조건에 대응하는 두 처녀의 방식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적극적인 생각, 긍정적 발상만이 생산적인 삶을 살게 한다. 생산적으로 살아야만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할 터이다.

남을 이롭게 하면서 불행한 사람은 없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행복한 사람도 없다. 생각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불행한가? 그리고 그 탓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계속 불행할 것이다. 타인이 당신에게 불행의 원인을 틀림없이 제공했을 터지만 그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했느냐 하는 책임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응이 바로 당신을 불행으로 혹은 행복으로 갈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셈이 된다.

불행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며 불평만 일삼고 있다면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은 나 자신의 편견과 아집을 끊임없이 탈피하는 과정일 수 있음으로.

여기 한 이야기가 있다.

한 스님이 제자와 함께 생선가게를 지나는데 스님이 ‘그 생선 참 맛이 있겠다.’ 고 했다.

사찰에 돌아오자 내내 실망하고 있던 제자가 물었다 ‘도를 닦은 분이 어떻게 생선을 보고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가요?’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벌써 잊었는데 너는 아직 마음에 두고 있더냐”.

최근 불교 신문에서 읽은 내용이다. 도에 이른 사람과 집착이라는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보라.

 상황을 바라보고 분별하는 것은 내 자신의 책임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음이다.

흔히 고난이 인간을 성숙시킨다는 말을 듣는데 역경이란 결국 자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기회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용서할 기회, 너그러워 질 기회, 세상을 배우는 기회인 셈이다.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원하는 희망 사항이지만 그러한 경우는 없기도 하거니와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인간의 본성 속에 굳건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우매함을 벗아 날 길이 없으리라.

살아내는 일이 쉽지 않아 많은 사람이 청춘도 다 지나기 전에 목숨을 잃어버리는 세상이다.

어쨌거나 병원에 오신 할머니가 그 나이까지 무사히 살아 냈다는 것은 축복 받은 삶이 아닌가! 

생각을 바꾸도록 다독인 내 지혜로운 친구에게 갈채를 보낸다. 

공  옥  자
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