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항구였다아- 철석철석 파도치는 꽃피는 항구. 안개속에 기적소리 옛님을 싣고, 어디로 흘러가나 어디로 흘러가나.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이슬비만 내리네. 여수는 항구였다아-마도로스 꿈을 꾸는 꽃피는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오막살이 처마 끝에 부슬부슬 이슬비만 내리네.” 10ㆍ19사건 당시 여수사람들의 심금을 흔들었던 ‘여수 부르스’ 다.
그러나 진압군에 의해 금지곡이 되어버렸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10ㆍ19사건이라고 부른다.
4ㆍ3을 진압할 명령을 받았으나, 그 명령을 거부하고, 네 시간 만에 시내를 장악했다.
반란군은 순천까지 수중에 넣었다. 벌교ㆍ보성ㆍ고흥ㆍ광양ㆍ구례를 거쳐 곡성까지 점령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들은 10월 27일 진압되었다.
여수는 반군 2백여 명과 학생 1천여 명이 방어하고 있었다.
박격포 사격으로 시작된 진압군의 시가전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공모자 색출이 시작되고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미군이 뒤에서 제주항쟁의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승만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정적 김구까지 궁지에 몰아넣을 ‘호재’를 만났다.
그래서 국가보안법도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제주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지난 8월 12일 광주의 오월어머니회는 제주4ㆍ3, 10ㆍ19사건, 5·18항쟁 유가족들을 초청해 연대방안을 찾는 모임을 가졌다.
국가폭력으로 가족을 잃고 수십 년 동안 고통을 겪어온 유가족들한테 60년에 걸친 안타까운 사연들을 듣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간인 피학살자 유가족의 연대 방안도 논의하였다.
초청자 모두 건국과 민주화 과정에서 ‘역사의 아픔’을 겪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이다.
‘10ㆍ19사건’은 ‘여수 반란사건’이라고도 불러왔으며, 한때 명칭에서 오는 잘못된 선입견을 벗겨보고자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도 부른다.
10ㆍ19사건은 ‘4ㆍ3’과 더불어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최대의 민족사적 비극이며, 여수ㆍ순천 사람들에게는 기억하기 꺼려하는 사건이다.
여수주민들은 ‘당한 것만도 지긋지긋한데 대답은 무슨 대답이냐’ 며 사건에 대하여 지금도 회피한다.
사건 자체가 우리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충분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4ㆍ3사건진상보고서』에는 이승만에게 10ㆍ19사건은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쓰러뜨릴 기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건은 민족분단으로 치닫던 역사적 과정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건이 발발한지도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건 유족들은 민족구성원으로의 대접은커녕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가 저지른 국가폭력이 정당하지 않다면 수천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물론 좌익이 개입되었다. 그렇지만 4ㆍ3과 만찬가지로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사건임이 분명하다. 남로당에 대한 수사가 강화되기도 하였다,
공산당과 좌익이라는 말은 원래는 관계가 없다. ‘좌익ㆍ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뒤 처음 사용하였다.
프랑스혁명이 끝나고 국민의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급격한 혁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의장으로 보았을 때 왼쪽에 앉았고, 그와 달리 온건한 방법으로 혁명을 진행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른쪽에 앉아서 ‘좌익ㆍ우익'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좌익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너무 깊게 우리 뇌리를 점령하고 있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 역시 10ㆍ19사건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해 10월까지이다.
반란군은 좌익민중들과 연합하여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진압군에 격퇴당하여 지리산 등의 산악으로 들어가 2ㆍ7구국투쟁이후 형성된 야산대와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