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가 돌아왔다/ 겨울에 떠났던 그가/ 겨울에 다시 돌아왔다 산속에서 초인이 된 그가/부처가 된 그가 꿈에도 그리던 지배했던 거리로 돌아왔다” 이응준의 시 「각하가 돌아왔다」의 첫 구절이다.
각하(閣下)는 황송무지한 호칭이다. 너무나 높으신 분이라서 감히 같은 땅 높이에서 뵙지 못하고 ‘전각 아래에서 뵙는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시인은 국회의원 당선자의 면면을 보면서 각하는 다시 돌아왔다고, 그의 출연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초인이 된 그가, 예수가 된 그가, 부처가 된 그가, 다시/ 군림하고 호령했던 도시로 돌아왔다 기억이나 나는지/ 그가 우리 곁에 있었던 지옥과 같던 나날들” 시인은 각하를 환영하는 속세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읊조린다. “행복했었나 즐거웠었나, 손 흔들며 /노래로 환영하는 이 혼란한 속세에서/우리 형제들은 왜 피 흘렸었나 /우리는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나”
각하를 향한 비판의 시어(詩語)는 다른 시인도 목숨을 걸고 날을 세웠다.
시인 김남주는 데뷔작 「진혼가」에서부터 각하를 몰아세웠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시인은 그 한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았으며 한국 현대사를 얼룩지게 한 최고 권좌를 계속 나무랐다.
그래서 「대통령 하나」라는 시를 더 썼다. “나는 왜 나를 친애까지 했던 그들을/ 이를테면 이 아무개 박 아무개 전 아무개 같은 이들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사기꾼 폭력배 정상배 매국노 반역자/ 그 따위 이름으로밖에 기억하지 못 하는가/ 혹시는 내 입이 워낙 더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혹시나 내 출생이 워낙 천해서 그러는 것일까”
이응준이나 김남주 시인처럼 날카롭게 쓴 소리를 내뱉는 반면에, 서정주처럼 수치스런 친일행위의 시를 쓰다가 자진하여 이 아무개 전기를 쓴 시인도 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전 아무개의 웃음을 오천년 이래 최고의 미소란 찬사로 칭송하였다.
“한강을 넓고 깊고도 맑게 만드신 이여 /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중 일부분이다.
군중이란 황홀한 존재인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다.
군중이란 하늘에 뜬 구름보다 더 무상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정치가들이 툭, 하면 내뱉는 “국민의 위대한 선택”이니 “현명한” 혹은 “절묘한”이라는 수사를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시간상으로는 과거에 속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현재적이다.
어쩌면 지난번 총선 결과는 우리 안에 내재해 있던 파시즘의 부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응준의 고백처럼, 당선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각하께서 돌아오신 게 아닌가 하는 환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끈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그 대중들이, 그 시절 그 환희의 역사를 바로 다시 세울 수 없다는 고민에 빠졌다.
필자는 요즘 서너 곳에 문학 강연을 나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강좌에서, 어떤 수강자가 난데없이 질문을 던졌다. “박 아무개는 우리나라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나서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보수신문의 여론조사에서도 박 아무개는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나와 있지 않은가.
이제 당신은 박 아무개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주위에 질문을 던져볼 일이다.
거의 모두 대답할 것이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새마을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박 아무개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위해서 진정으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부분, 총으로 백성을 다스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