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는 주고받는 대인관계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공짜가 없다. 누구든지 직장 생활이이나 사업을 하거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내가 과연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공과 가족의 행복, 인간다운 삶의 여부가 결정되는 키워드(key word)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부모와 자식관계처럼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주고받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우리들은 삶의 성공을 꿈꾼다. 이 꿈은 결국 직업인으로, 또는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만족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어떤 것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크게 좌우 될 수 있다.
서양속담에 “주는 것을 그만두면 받는 것도 끝나며, 배우기를 그만두면 성장도 끝난다.(the day stop giving is the day stop receiving and the day stop learning is the day stop growing)”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능력은 준비하는 자의 몫일 수 있다. 여기에서 능력이라는 의미는 물질(副)의 개념은 아니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일생을 공부를 하고, 마음을 수련하는 자를 인간의 최우선 가치로 공자(孔子)사상에서 말하고 있다.
물론 지식(knowledge),정보(information), 언어, 노동력 등은 필요한 능력이고 눈으로 가늠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이런 눈에 보이는 능력보다는 눈에 안 보이는 배려(配慮)이라는 능력이 더 필요하고 값어치 있고, 사회를 맑게 할 수 있다.
성공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충실하게 주다보면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대가이다. 실역으로 경쟁자를 쓰러뜨리거나 누군가를 밟고 일어선다고 해서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성공자체만을 목표로 달려가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성공한자가 아니다. 상대방의 극히 필요한 것을 주는 배려(配慮)야말로 일과 가정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는 새로운 성공의 가치관이다,
어질인(仁)이라는 글자는 사람인(人)변에 두 사람(二)이 결합된 글자이다. 사람 둘만 모여도 서로를 위하여야 되고, 위하는 것은 곧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공자(孔子)의 도덕중심 아이콘이다. 이 아이콘(icon)의 가지고 있는 용량의미가 배려(配慮)일 수 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보시(布施)가 배려이다. 불가에 최상의 보시는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는 것, 아픈 자에게 약을 주는 것, 가난 자를 도와주는 것,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등등이다. 금강경에 있는 법어이다. 나의 집 마당에는 가을에 정원수 열매를 따먹기 위해 새들의 많이 다닌다.
며칠 전에는 집 마당에서 콩 주스(juice) 할 제주산 콩을 햇볕에 말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비둘기 보다 조금적은 새 두 마리가 갑자기 와서 콩을 먹다가 물고 가는 것이다.
나의 처(wife)는 이런 광경을 물끄럼히 보면서 새를 쫒지 않아서 왜 새를 쫒지 않으냐고 했더니 새가 먹으면 얼마나 먹느냐고 했다.
아마 아녀자 불교신자로서 배고픈 새에게 보시를 한다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듣고 감동적이었다. 그날 내내 따스함이 나의 가슴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남을 위한 배려는 바로 이 것이구나 했다. 배려는 이런 필요한 사람에 주는 것이다. 있어서, 남아서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주는 것이 배려이다. 하지만 지나친 배려는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한다. 적정한 배려와 그에 걸맞는 행동이 우선시 되어야 진가를 발휘한다.
나는 믿는다. 자신의 작은 배려가 남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 되는 배려는 자신에게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 아무리 정보화 사회, 각박한 산업화 사회의 능력시대라고 하지만 실력, 학력, 재력 등등이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배려는 맑은 사회와 자신의 성공 할 수 있는 지름길임이 분명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