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투쟁의 선봉이었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선생은 평소 몸을 꼿꼿이 편 채로 얼굴을 씻었다.
세숫물이 목과 팔로 줄줄 흘러 내려 옷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보다 못한 선배가 “이 사람아, 허리를 조금만 굽혀서 하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왜놈들이 이 땅에서 물러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고개를 숙일 수 없습니다.”
이는 사상가이면서 사학자요 언론인인 단재 개인의 자존심이자, 자나 깨나 조국의 독립을 원하는 대한제국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가히 ‘자존심의 화신’이라 할 터이다. 1936년 그는 끝내 망국의 한을 품고 일본군 감방에서 옥사하고 만다.
자존심은 개인은 물론이고 조직과 집단, 국가와 민족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다. 자존심(自尊心)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일이요, 자기의 몸과 심성을 곱게 가지려는 자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품위를 지키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배타적이거나 교만한 것은 아니다.
자존심은 자기가 존귀한 만큼, 타인도 존엄하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도량(度量)이다.
따라서 남을 이해하고 인정ㆍ배려하려는 태도는 인간이 행하여야할 지고(至高)의 윤리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단재가 가신지 어언 72년. 지금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이래 40여 년간이나 우리의 국권을 침탈했으면서도 아무런 뉘우침이 없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니다. 도대체 일본의 이 못된 작태를 어떻게 응징해야 할 것인가.
요즘 계속 불거지고 있는 ‘광우병’도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안이다.
촛불 시위는 국민의 의사와 정서를 무시한 정부의 ‘굴욕외교’나 ‘졸속협상’만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다.
미친 소(?)의 수입으로 인한 국민건강의 위협과 축산농가의 몰락을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
바로 ‘거대(巨大)미국’에 대한 국민적 감정, 민족적 자존심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당국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무어라 부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피로서 맺어진 혈맹ㆍ맹방이라 칭하며, 우방중의 우방으로 우대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우리와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근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사망사건’도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다.
우리는 동족인 북쪽을 측은히 여기고, 다양한 부문에 걸쳐 지속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북측의 수뇌들은 우리에게 전혀 고마운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당연한 것인 양, 고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풍기고 있다.
더구나 미국과 일본의 원조는 받으면서도, 남쪽의 것은 안 받겠다는 작금의 행태는 저들의 얄팍한 수작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일방적인 ‘퍼주기 식 지원’은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민족적 자존심이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ㆍ강조하고 또한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민족적 자존심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민족의 자주와 자존의식을 낮춰서는 결코 아니 된다.
자부심으로 단단히 뭉쳐, 민족의 역사ㆍ전통과 잠재력을 드높여야 할 때이다.
일본과 미국은 우리의 자존심을 해치지 말라.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자존심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과 배달겨레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도 부합될 것임을 알라.
단재 신채호를 낳은 우리 민족은 자존심이 강하고 위대하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참된 자존심은 무엇인지 숙려(熟廬)하여보자.
우리 스스로를 도약(跳躍)시켜, 저 멀리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자.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