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제주도 문화행정의 후진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의 조건>의 작가 앙드레 말로(1901~76)의 치적을 끌어다댈 필요가 있다.
예술은 근대의 종교이며, 미술관은 그 사원이라고, 그는 역설하였다. 제주도의 현실이 그가 말한 미술관을 문화원으로 대치시킨다면, 우리의 논의가 매우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제주도는 금년 초 4개 문화원에 공문을 보내 통ㆍ폐합을 권고하였고, 재정 지원까지 하루아침에 중단해 버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문화원들은 통합을 서둘러야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앙드레 말로는 1959년부터 69년까지 프랑스 문화부장관을 맡아 기발한 정책들로 호평을 받았다. 곳곳에 ‘문화의 집’을 세워 문화 대중화의 거점 모델도 만들었다.
건축물 건립비용의 1% 이상을 문화적 용도에 써야 한다고 규정한 ‘1% 법’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 문화정책에 복지개념을 도입한 것도 그였다.
드골은 "나의 오른편에는 천재적인 친구 말로가 있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그를 칭찬할 정도였다.
지방문화원진흥법 제4조6항에는 ‘지방문화원은 시ㆍ군 또는 자치구별로 1개의 원을 둔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남ㆍ북군이 폐지됨에 따라 남제주ㆍ북제주문화원은 문을 닫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문화원진흥법 부칙 제4조 제2항에 의하여 남제주ㆍ북제주문화원은 존속이 가능하다.
그리고 기존의 문화원은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제주도지사의 설립인가를 받아 설립된 것으로 보아야 마땅했다.
제주도는 이미 「제주도지방문화원지원 및 육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고, 시ㆍ군이 폐지됨에도 4개의 지방문화원을 존속시켰고, 그것을 가장 훌륭한 문화행정의 본보기라고 침이 마르게 자찬하였다.
그렇지만 무슨 영문인지 서둘러, 두 개 문화원의 문을 닫게 만들고 말았다.
지난 세기 좌파 지식인에서 문화 관료로 변신한 앙드레 말로가 지금까지 찬사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주도에는 말로처럼 신념 있게 문화행정을 추스르는 행정가는 없을까? 말로는 드골 정권의 나팔수로서 문화 대중화와 문화국익이란 공약수를 찾았다.
그는 ‘작업하는 문화인, 운명에 항거하는 예술’이란 지론을 평생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이 그 지난한 투쟁의 산물이며, 저항의 빛나는 기념탑이라는 인식은, 오직 예술만이 문명, 인간 사이의 연대성을 보증한다는 휴머니즘 예술관을 낳게 만들었다.
그런 그였기에, 철골 괴물이라던 파리 에펠탑을 국가기념물로 지정했고, 프랑스의 명품 ‘빌라 사부아’를 철거 위기에서 구해내고 보존했으며, 음악국을 독립부서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주도의 행태를 보라. 공문 한 장으로 통폐합을 권고해놓고, 지원금도 끊고, 팔짱을 끼고 앉아 남 ? 북문화원이 문을 닫기만을 기다렸다.
북제주문화원의 경우 창립 당시부터 꾸준하게 지역에 산재한 고문(古文) 등을 발굴 ? 발간하였으며, <백수여음>의 경우 「한겨레신문」에 소개되어 전국 독자들의 문의가 쇄도할 정도였다.
여기에는 저자 김경종 선생이 4ㆍ3당시 그 실상을 알리고 막아달라는 항의문도 포함되어 있어, 너무 훌륭한 한문문서라는 평가까지 받아왔다.
그것만이 아니다. 묻혀있는 지역관련 서적 열다섯 권을 발간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역사유적지에 표석을 세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통폐합이 어떤 이유로 진행되었던, 한번쯤 도당국은 남ㆍ북제주문화원 이사들을 불러들어 통폐합의 좌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이사회가 열린 북제부문화원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도 당국을 향한 성토장이었다.
제주도는 거창하게 도청방침으로 ‘독특한 문화예술’을 앞세우고 자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화원 가족들을 하루아침에 거리에 내몬 행위는 문화예술의 앞날에 먹구름만 드리게 하였다.
분명히 말한다. 비록 문은 닫았지만, 향토문화를 사랑하면서 5년 동안 문화원을 지켜온 회원들은, 마음을 모아 향토문화를 위하여 매진하고 꾸준하게 문화운동을 전개할 것을 도 당국에 천명하는 바이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