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위해서라면 肝까지도
어머니는 사랑 자체였습니다. 값을 바라는 사랑이 아니라 거저 주기만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제 가슴을 쪼아 흘린 피로 새끼를 먹여 살린다"는 펠리컨(사다새)의 전설처럼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肝)까지도 내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을 날줄로 하고 인고(忍苦)를 씨줄로 하여 짜 올린 유기체였습니다.
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양초처럼, 제 몸을 흔적도 없이 녹여 맛을 내는 소금이나 설탕처럼, 제 살갗을 벗겨 더러운 때를 빼는 비누처럼,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태우고 스스로를 녹이고 스스로 가죽을 벗기는 고통도 기쁘게 이겨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이 그랬습니다.
김치는 여섯 번 죽어야 제대로운 맛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배추가 밭에서 뽑힐 때 한번 죽고, 식칼로 통배추의 배가 갈라질 때 두 번 죽고, 소금에 절이면서 세 번 죽습니다.
절인 배추가 매운 고추와 짠 젓갈에 짓이겨 버무려 지면서 네 번 죽고 독에 담겨 땅속에 묻히면서 다섯 번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에서 꺼내져 도마 위에서 칼로 토막 나면서 여섯 번 죽게 되는데 그런 연후에야 김치의 제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국적 에너지
어머니의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식을 위해 김치처럼 열 번도 스무 번도 더 찢기고 죽으며 살아 왔습니다.
자식만 잘 된다면 죽음보다 더 진한 고통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세상에서 따돌림당해도, 잡초처럼 짓밟히는 수모의 삶을 겪어도 애로라지 자식을 위해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불경(佛經)에 이르기를 "어머니는 목숨이 있는 현세에는 자식의 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죽은 다음 저승에서는 자식을 지키는 영혼이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지아비가 죽으면 땅에 묻어버리지만 자식의 주검은 영원히 가슴속에 묻어 둔다"는 말도 어머니의 자식사랑 이야기입니다.
세상 어머니들은 제 자식을 최고라고 여깁니다.
제 새끼가 숲 속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어미 메추라기처럼 모든 어머니들은 제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머니 마음입니다.
오늘 이 정도라도 나라살림을 일군 한국적 에너지의 기저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지난 세대를 이 악물고 살았던 어머니들의 치열한 자식사랑이었다고 합니다. 그 열정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이 자양분이었습니다.
나라는 균형감각 잃고 표류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 같은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지금 살아 계시든, 이미 세상을 뜨셨든, 지난 세대 어머니들의 인고와 희생을 뜨겁게 가슴에 새겨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의 꿈꿨던 살맛 나는 세상, 모든 아들딸들이 잘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권력은 한쪽 눈으로만 가려고 하는 외짝눈의 비목어(比目魚.넙치)처럼 균형감각을 잃어 버렸고 국론(國論)은 넌더리나는 편가르기로 찢어져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권위주의를 비판하던 집권 세력은 또 다른 도그마(독단)에 빠져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권위주의적으로 민심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궤변과 억지논리로 민심의 흐름을 역류시키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해도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 빈곤층'이 점점 두터워지고 껌 씹으며 놀아도 배 두드리는 '유한 부유층'이 거들먹거리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거기에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논두렁 지렁이 밟듯 아무런 뒷감당 없이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짓밟아 버리는 토악질 같은 언어 린치가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비겁하게 입다물고 앉아있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행동하는 양심'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어머니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면 참으로 무섭고 참담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