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타인은 나에게 방해꾼인가
[세평시평] 타인은 나에게 방해꾼인가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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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본다.

 가까운  예로 금번 총선에 출마해서 패배의 쓴 잔을 마신 사람들에게는 타 후보가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방해자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것인가.

 거창한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도처에서 우리는 타인의 방해를 겪는다. 

사람들로 붐비는 모든 장소에 타인이 내게 걸림돌이 되는 순간을 보고 있으니 저 말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한정된 목표에 도달하려는 사람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타인은 적대적 위치에 놓인다.

경쟁사회라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꾼으로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육강식은 동물 세계의 생존 양식이지만 인간 삶에서도 포장이 조금 우아하달 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먹이를 놓고 싸우는 일은 본성이라 치고,  배를 채우는 일 말고도 명성, 지위, 권력 따위를 얻으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다.

경쟁의 룰은 객관적 합의를 거처 공인되어 있으나 모범생은 적고 편법을 동원하여 목표를 이루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세상이 늘 시끄러운 이유다.

비단 정치뿐인가 사회 각 분야마다 남보다 앞서고 높이 오르려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모함, 술수, 폭력 등은 거기에 동원되는  온당치 못한 경쟁의 수단이고 서로 상대를 향해 비난을 일삼아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이다.

 두어 세기 전, 독일의 철학자가 했다는 저 말이 인간 삶의 단면을 극명하게 짚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그렇기만 할까? 라는 의문이 오는 것은 그래도 인생에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서이다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은 비극을 자초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팔레스타인의 공격을 받고 국운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이라는 목동이 나타나 조약돌 몇 개로 거대한 적장 골리앗을 쓰러 트려 승리를 얻었으나, 왕은 여인들이 다윗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를 듣자  질투에 이성을 잃고 다윗을 적대시한다.

 기회만 있으면 다윗을  죽이려 시도했으나  결과는 그 자신이  처참한 최후를 맞고야 만다.

 사울왕은 우리가 누군가를 적으로 돌렸을 때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웅변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윗을 자기의 분신처럼 아꼈다면 왕의 최후는 평화로웠을 것이다.

성서를 읽을 적마다 실로  연민의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지나간 역사에서 교훈을 깨닫는 후손들이 화합과 상생이라는 말로 금세기의 화두를 삼은지도 오래 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아직 걸음마 단계가 아닐까.  적대 관계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이용물로 본다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기쁨이나 행복은 건져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가까운 사례가 있다.

아내가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또는 남편이 아내를 살림꾼 하녀로 여기는 부부가 있다하자 그들이 적대감을 품지 않더라도 비극적 상황이 아닌가.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 관계가 <너와 나>로 정립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사람을 수단화 하지 말고 목적화하라는 주문이다.  타인을 자아의 확장 선에서 끌어안으라는 이 가르침이 실현 될 가능성은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에는 영원이 숨 쉬고 있다 했던가. 나는 아직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하던 시절 청춘의 열기로 한겨울 추위도 겁 없이 야밤 데이트에 나섰다가 낯선 집 처마 밑에서 칼바람 피하던 기억이 있다.

그 때 그 모르는 사람의 집 처마는 철없던 두 사람에게 잠시 안식처가 되어 주었었다.

 공연장이나 강연 등 대중을 위한 행사를 할 때 거기 다른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고 단지 나 혼자라면 아마 그 날의 일정은 취소 될 것이다.

그 곳에 모여 드는 불특정 다수의 낯선 사람들은 모두가 모두에게 그 행사가 진행되도록 도와주고 있는 호혜관계로 연관 된다.

타인이 결코 방해자가 아니라 돕는 자로서 존재하는 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어느 날 승객이 나 혼자라면 비행기는 뜨지 않을 것이고 환자가 단지 나 뿐이면 병원은 문을 닫을 것이다.

 한 생을 살며 직간접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사는지를 의식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방해자로서 대응하는 사울왕처럼 참담한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공   옥   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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