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김익렬' 장군 동상
[세평시평] '김익렬' 장군 동상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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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재향군인회가 내년 4ㆍ3에 맞춰 김익렬 장군 동상을 제주에 세우겠다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단체는 기존 재향군인회의 극우적 활동을 지양하고, 군대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2005년 설립된 단체이다.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과 동북아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앞장서 봉사할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군사 사상은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에 뿌리를 둔 평화 애호의 ‘방어전쟁’ 사상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국군 장병들은 지금도 조국의 평화통일에 이바지한다는 사명감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익렬은 과연 누구인가? 4·3 당시 9연대장이며, 민간인 학살의 초토화 작전을 거부, 결국 그 직책에서 교체된 장군이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무장대 진영으로 들어가 김달삼과 4시간에 걸친 담판을 벌인 끝에 ‘4ㆍ28 평화협상’을 이끌어내었다.

두 사람의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다’는 합의는 ‘오라리 사건’으로 결국 깨지고 말았지만, 그는 계속 초토화 작전을 거부하다 미군정으로부터 해임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김익렬은 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당시 진상을 밝히는 ‘4ㆍ3의 진실’이란 유고록을 남기면서 “4ㆍ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집필 사유를 밝히고,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일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의 글은 1992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만일 그가 주도한 협상을 미군정과 군 수뇌부가 받아들였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앗아간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4ㆍ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김익렬의 패널 앞에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유품이 전시돼 있다. 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의 유고록도 공개되었다.

평화냐, 유혈사태냐는 갈림길에 서 있던 협상을 깨고 초토화 강경작전으로 내몬 미군정과 우리 군 수뇌부의 행적이 담긴 친필 원본이 결국 세상에 공개되어 4ㆍ3 진상에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미국에도 평화재향군인회가 따로 있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적 사회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보다 나은 발전이 가능하다.

그들의 주장처럼 기존의 재향군인회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학자들은 학문적 관점에 따라서, 정치인들은 정치적 신념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나눌 수 있지만,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안보문제의 원칙을 두고는 보수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재향군인회는 최소한 반민족적 극우 신문에 놀아나 성조기 흔들며 “맹방! 맹방!”하는 맹목적이고 추종적인 사대주의의 행태를 배제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민족 자존심부터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또한, 친일-군부독재 세력들의 전유물처럼 되어온 안보에 관한 담론을 국민의 것으로 되돌려 활성화시키는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민간인 학살의 초토화 작전을 반대했던 김익렬의 존재는 바로 거기에 큰 의미가 있다.

상부의 초토화 명령을 거부, 교체됐지만 중요한 것은 고위 간부로서 당시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이다.

평화재향군인회가 앞장서고 있는 김익렬의 동상 건립이야말로 4·3의 진실을 드러낸 참 군인의 행적을 넘어 역사의 진실이 결국은 세상에 밝혀진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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