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외국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번역, 출판하여 화제다. 어른들의 졸렬한 번역으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조선일보 2008. 3.11).
오죽 번역이 잘못됐으면, 해외거주 경험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가 원서를 직접 읽으며 어른들의 무성의한 번역에 반기를 들었을 것인가.
번역은 정말로 어려운 노동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나라의 말로 된 문장을, 자기나라의 글로 옮기는 작업이 결코 쉬울 수가 없을 터이다.
번역이 지난(至難)한 일이다 보니, 육회(肉膾)를 six times(6회)로 번역하는 것과 같은 엉터리 오류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번역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일본의 근대화는 번역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서양사회를 모방하다시피 한 일본은 그 근대화 과정에서, 광범위한 서양문헌의 번역에 큰 비중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은 외국의 사상과 개념을 단순하게 수용하거나, 외국학자와 작가들의 꽁무니를 따라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번역을 통하여, 외래문화를 자국의 전통에 따라 변용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는 문화적 실천을 꾸준히 계속하여 왔다.
그리하여 ‘번역’은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라고 얘기할 만큼, 오늘의 경제대국 일본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이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번역문화가 독창성을 배제한다든지, 그 나라의 문화적 자립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문화적 자립을 튼실하게 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번역문화는 창조력을 자극하면 자극했지 억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국내에서 발행되는 책 가운데, 번역서의 비율이 29%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가히 ‘번역도서 천국’이라고 할만하다.
문제는 번역의 질(質)이 양(量)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수신문’이 해당 전문가들에 의뢰하여 분석한 바에 따르면, 수준미달의 번역서가 꽤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등지의 서적은 물론이고, 동양의 고서들도 추천할만한 것이 많지 않다는 결론이다.
예를 들면『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은 추천할 만한 번역서가 아예 전무하고, 동양서인『주역』과『수호전』등은 적절한 최고의 번역본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애독하는『삼국지』도 오역부분이 많다고 한다.
일본은 번역에 의해 근대화 · 문명화를 이룩하고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 돋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번역천국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우수한 번역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국가적인 손실이요, 수치이다.
고전이나 명작 · 학술서의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퇴보하고 있는 것은, 번역을 국가적 이익이나 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풍토 탓이다.
특히 학계가 그러하다.
아무리 필요한 책, 두툼한 책을 정성들여 번역한다 해도 그 가치를 올바로 평가해주지 않는 것이다.
되레 논문 한두 편 쓰는 것이 더 인정을 받는 형편이니 말이다.
질적으로 수준 높은,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번역서를 권장하려면 먼저 뜻있는 학자 · 번역가와 출판사를 위한 특단의 후원방안이 뒷받침돼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역사 · 문화를 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번역사업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야 한다.
이들에게 정부차원의 획기적인 지원정책이 시혜(施惠)됨으로써 문화대국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는 것은 ‘우리 글’ ‘우리 책’에 대한 외국어 번역이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까닭이다.
새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이다.
溪山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