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끝낼 무렵이면 구름산이 둘러선다 / 까마귀, 떼까마귀로 하늘까지 뜨는 산들 / 부채살 펼친 노을은 그리시던 서천(西天) 꽃밭. // 벌초 갔다 오는 길에 산 그림자 따라오고 / 가을, 그 이름만으로 얼핏설핏 그리운 이 / 아버님, 갈증으로 쓴 묘비명을 띄웁니다. // 한 세상 사는 일은 흙 한 줌 덮는 거다 / 그것도 상마을에서 환생화(還生花)로 피는 거다 / 구름산 줄기줄기에 떠 흐르는 묏자리들.
‘벌초길에서’ 착상한 시조 한 편이다. 제주의 음력 8월달 대표적인 세시풍속은 벌초다. 8월이 들면 초하루에서부터 추석 전날까지 조상의 무덤에 벌초를 한다. 특히 초하룻날은 묘제나 시제를 지내는 웃대조의 묘소에 친족집단이 모여 공동 벌초를 하는데, 이를 ‘모둠벌초’라 한다. 예전에는 ‘모둠벌초’를 통하여 웃대조의 묘역을 소분한 후에 아래가지 벌초를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초하루 전에도 벌초를 하며, 추석전까지 끝내는 것이 제주도의 벌초 풍속이다. 벌초는 대개 무덤들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면 자손들이 모여 하루에 끝낸다. 그러나 여러곳에 흩어져 있으면 2 ~ 3일씩 걸리는 수도 있다. 이럴때는 보통 지역별로 분담하여 벌초를 한다. ‘모둠벌초’ 때는 한 가구당 한 두명씩 나온다. 제주의 벌초풍속이 다른 지방보다 더욱 두드러진 것은 이처럼 일정기간에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8월달 제주에는 혈육찾기가 한창이다. 제주의 조상님들은 살아 생전의 안락보다도 돌아가신 후의 극락을 더 원했다. 그래서 추석전에 벌초를 마쳐야 조상님들이 명절상을 받는다고 믿어 왔다. 제주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의 무덤에 풀을 안 베어 내면 불효손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죽은 후에 제사 명절을 해 달라는 거라고 관념화되어 오고 있다. 벌초를 갔다가 골총(古塚)을 만나면 후손이 대 끊어 진 묘라고 하여 혀를 차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제주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잘 써야 집안이 발복한다고 여겨왔다. 자손이 번창하고 출세하는 집안을 일컬어 조상님의 도와 줘서 산천이 베롱한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풍수 좋은 곳을 찾아 묘를 썼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벌초 문제가 대두되면서, 가족묘를 마련하고 조상묘들을 한 곳으로 집단 이장하여 모셨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화장과 납골당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도 미래의 벌초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기인된다. 이러한 세시풍속의 변화는 외아들시대에 접어들면서이다. 정부가 인구 감소 정책으로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너무 많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구호를 내걸고 가족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외아들, 외딸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결과 대가 끊어지는 집안도 생겨나게 되었고, 설사 후손이 있더라도 벌초풍속을 대 이어가기란 여의치 않은 상황에 이르렀다. 살길을 찾아 육지로, 외국으로 떠난 ‘나홀로 후손’들이 매번 고향에 와서 벌초하기가 그리 녹녹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산장려금까지 주겠다는 시대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다음 세대까지 벌초 풍속이 이어질까? 오늘을 사는 세대들은 사후를 심각히 생각할 때다. 농경시대에는 조상묘를 잘 모시는게 효자였고, 산업화 시대에는 벌초 잘해야 효손이었지만, 홀홀 단신이거나 혈육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정보화 시대에는 골총들이 수 없이 생겨날 판이다. 오늘을 사는 세대들이 근심이 천근만근이다. 벌초의 위기가 오고 있다.
벌초 못하는 골총(古塚)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혈육찾기 벌초, 대 끊어 질꺼주?’ 나이드신 분의 한숨 섞인 말씀이 허사가 아닌 것 같다. 벌초 끝내고 잔 올린 자리에 조상님의 헛기침이 묻혀 온다. 조상님도 미래의 벌초현실을 예감하시는 걸까? 답답한 가슴에 물안개가 깔리고 노을진 서녘 하늘에 무연묘들이 떠 흐른다.
시조시인 현 춘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