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머니는 정뜨르비행장 울타리 부근에서 서성거린다.
60여 년 전 총살당한 아버지의 혼백(魂魄)이라도 찾으려는지, 가끔 하늘을 쳐다본다.
우리는 결코 팔순이 지난 어머니에게 그 아픈 사연을 묻지 않는다.
아아, 어머니는 그렇게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통곡의 땅에서 연명하는, 어머니의 모진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어린 시절, 사람들은 애정 어린 눈으로 소년을 향하여 ‘폭도 새끼’라고 놀려대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오직 큰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하였고, 희생자 가족이라 큰 꿈을 접으라는 어느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절망도 했다.
그렇지만 그 충격을 감내(堪耐)하며 대학에 입학하였고, 서울을 향하는 비행기 트랩을 오르면서 그 바퀴가 짓누르는 땅이 아버지가 묻힌 땅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기도 하였다.
그것은 소년의 일생을 옭아매고, 온몸을 붙잡고, 엉엉 울부짖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누가 그 상처를 지금 꿰매준단 말인가?
아아, 소년은 결국 이름 없는 시인이 되었고, 당시 사형수 명단에서 겨우 아버지 이름을 발견하였고, 이제 아버지를 향하여 가슴 저린 시(詩)를 노래할 뿐이다.
아아, 우리 모두의 아버지.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 큰 멍에를 지우고 말았다.
역사가 너무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아들 녀석이 권고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이데올로기는 종언(終焉)을 고했다고 말이다.
아아, 누가 이데올로기를 논했는가? 대통령도 국가공권력에 대하여 사과하였다.
아아, 이제 눈물을 거두고 어머니를 위한 진정한 보상(補償)을 논의할 때가 아닌가?
오늘도 어머니는 정뜨르를 서성거린다.
알베르 까뮈는 ‘20세기는 학살의 시대’라고 했다.
광주에서는 400여명 죽어 나갔고, 폴포트정권 시절 크메르에서는 120만 명이, 한국전쟁 당시에도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제주 역시 마찬가지다.
히틀러시대에도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 한마디로 제노사이드가 피의 역사를 규정하던 20세기였다.
그런데 요즘 일부 보수우익들의 행태는 무엇인가?
그들은 4ㆍ3을 ‘무장폭동’이라며, 희생자 전원을 ‘폭도’라며, 평화공원도 ‘폭도공원’이라며 난리를 피우고 있다.
더욱이 “제주4ㆍ3진상보고서는 가짜로 작성됐다”며 “제주시 봉개동에 ‘폭도공원’을 조성해 국군과 경찰을 중오와 타도의 대상이 되게 하고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학습장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4ㆍ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이를 토대로 대통령이 도민에게 사과한 것이 위헌이라며, ‘위헌심판소송’을 제기했으나 ‘각하’되었다.
공항활주로에는 무덤 없는 뼈들이 깔려 있다.
학살당한 죄 없는 사람들의 뼈가 수습되지 못한 채 묻혀있다.
작년 11월 14일 유골 발굴 현장의 한 구덩이에서는 36구의 유골이 발견되어 우리의 가슴을 쓰리게 하였다.
바로 그곳에 최소 500명에서 700명까지의 희생자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군법회의 사형수 249명과, 한국전쟁 발발 직후 도내 예비 검속자 500여 명이 총살, 매장된 곳이 바로 그곳이다.
결코 납득 되지 않는 우리 역사에 갑갑증을 느끼면서 다시 묻는다.
일제 치하 동안 무장투쟁 한 번 못해본 민족이 어찌 그리도 참혹하게 총칼을 맞대고 싸웠는가.
일제 헌병과 경찰에게는 감히 겨누지도 못하던 총칼로 형제와 이웃들은 어찌 그리도 무참히 섬 곳곳에서 총살시킬 수 있었는가.
당시 정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엄청난 학살 뒤에는 과연 어떤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는가?
대량학살이 자행되던 1948년 11월 중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그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도민이 희생되었다.
미군정과 국가공권력은 초토화 작전으로 섬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