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탄생하고 사회가 형성되면서 貧富의 兩面性은 발생하였다.
문제는 그 격차가 경제규모에 따라 정비례하였다는 사실이다.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사회가 되면서 급격히 커지고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문제는 개인 간, 집단 간, 나라 간에 생기고 그 규모도 커져 갔다.
급기야 평등을 부르짖는 정치이념이 탄생하고 이런 사회적 갈등이 번져 내분과 나라간 전쟁으로 번졌다.
경제의 주체도 토지나 노동, 자본에서 정보-지식으로 변했다.
현재는 富의 축적을 금융이 주도하면서 다각화되고 소수의 부와 다수의 빈곤이란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쿠바나 북한은 ‘빈부의 차가 생기느니 다 같이 못살자’며 버티고 그 이유로 담보할 정도이다. 富란 가진 자, 貧이란 못 가진 자란 이분법은 문제다.
여기엔 화패로 대표되는 돈을 비롯하여 자산의 가치에다, 권력이나 지식도 포함된다.
빈이란 가난이란 생계의 문제로부터 상대적인 빈곤이란 개념으로 바뀌었다.
부의 수단으로 부의 세습, 재테크의 성공, 고소득 월급 부자 등이며 빈은 빈의 세습, 재테크의 실패, 저소득층, 실업 등이 인자이다. 크게는 경쟁의 성패, 교육수준, 저축과 낭비, 건강 등의 우열도 작용한다.
결국 문제는 ‘부익부 빈익빈’이란 자본주의의 필요악이란 보편화다. 그렇다면 이를 시정 할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 이다.
부는 선천적인 두뇌와 건강, 부모의 세습만으로 체념해야 하느냐이다.
부는 행복의 잣대냐이다. 현대인의 상층 생활수준이 조선조의 임금보다 높은 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고·저소득이 행복의 정비례함수가 아니란 사실이다.
종교에서는 가난을 선으로 인식 성경에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여 악으로 규정했다.
석가모니불·공자·예수는 주유 고행을 통하여 得道했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安貧樂道를 금·권보다 높다고 택했다.
현대 물질문명이 성장하면서 물질에 대한 욕망이 인간을 얽어매었다.
이 욕망은 끝이 없이 증폭하여왔다.
20세기는 전쟁과 혁명, 평등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란 이념이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구의 도미노현상까지 일으키며 공산화의 물결이 전 세계를 풍미하였으나 100년도 못되어 종주국 소련이 무너지면서 동구가 무너졌다.
유일하게 중국, 베트남, 쿠바, 북한 등 몇 개국이 남아 있다.
중국은 政經分離로 자본주의를 뺨칠 정도의 수준으로 개혁개방을 통해 변하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회주의 나라는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경쟁이란 매체가 없이는 비능률이란 속성을 너무나 몰랐다.
한국은 기업의 비리, 청문회에 문제로 나타난 사례, 기부문화의 부족이 사회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가진 자의 부익부현상이 부각은 조세의 조정으론 한계를 보였다.
교육기회의 차등부여, 복지정책 등으로 보완을 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 영역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 10년간 좌파정부란 말을 들어가며 양극화해소정책을 폈으나 오히려 10년 전보다 상하(20;80)소득격차가 더 넓어졌다.
학문수준, 전문성의 깊이에 따른 과실은 누진세, 보유세로 소득분배를 하는 데는 실패했다.
감세정책도 고소득층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부담만큼 전가되고 있다.
직업분야의 전문성에 따라 고소득과 저소득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탑 연예·체육인, 대기업임원의 보수는 연 수십-수백억이 되고, 고기술, 전문성은 엄청난 임금격차를 만든다.
그래서 과거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공약도 결국은 이런 추세를 막을 수 없다는 게 공통된 분석인줄 안다.
경제가 좋아진다는 것은 주가나 펀드가 오르고, 산업이 성장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취업문은 넓혀지지만 그것이 저임금비율을 낮추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 빈곤층이 낮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소극적인 방안은 인식의 전환이다. 가난은 인생의 불가피한 속성임을 인정하자는 말이다.
식사 한 끼에 5만원, 5천원에 모두 자족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진실한 평등은 인간의 수명과 죽음이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행복의 잣대는 빈부에만 있지 않는다.
그리고 부의 사회 환원을 위한 재물범죄의 차단, 도덕성 제고, 사회악 가중처벌과 이웃돕기확산, 기부문화의 조장, 인사의 공정, 장학제도강화도 한계가 있다.
신은 가난한 편에 서 있다는 인식과 자기만족 수양이다.
지금도 최선을 다하면 ‘약자가 계천에서도 용천’함을 보고 있다.
김 계 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