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 참여정부 위정자들이 5년 내내 변화와 개혁을 외치며 곧잘 되 뇌이던 넋두리였다. 그럴만한 하소연이다.
개혁이란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정치 · 경제 · 사회상의 묵은 체제를 새 체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혁은 법의 테두리와 국민의 정서 · 관습아래서,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고정관념과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하기 때문에 혁명보다 지난(至難)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보다 쉽다고 하는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5.16 군사혁명’을 얼른 떠올리게 된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까닭이다.
5.16혁명은 다름 아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장교들이 민주당 장면정권(제2공화국)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부패하고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거사를 성취하였으나, 합헌(合憲)정권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잡았다는데 크나큰 약점이 있었다.
이처럼 혁명은 비합법적 · 반국법적 수단으로 종래의 국가권위나 권력을 뒤집어엎는 일을 칭한다.
결과적으로 5.16은 ‘한강의 기적’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박정희정권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쿠데타’로 규정되었다.
합법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집권하였다는 ‘정통성의 결여’가 그 이유이다.
물론 혁명이라는 단어가 총과 칼에 의한 정변만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급격한 변혁 즉, 어떤 상태가 빠르게 발전 · 변동하는 현상’도 혁명으로 풀이되어 있다.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에 해당될 터이다.
하지만 개신교계의 거두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는 살아생전 ‘4.19’에 혁명이라는 글자를 덧붙이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4.19는 집권욕이나 다른 어떤 불순한 의도에서 일으킨 사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정 · 불의에 항거한 학생들의 순수한 우국충정의 결정(結晶)이라고 강조하면서 ‘4.19 의거(義擧)’라는 표현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일이라고 주장한바 있다.
이에서 보듯이 ‘혁명’은 아무래도 ‘급격한 변화’라는 의미보다는 ‘힘에 의한 권력쟁취’라는 뜻에 무게가 더 실리는 듯하다.
세계사적으로도 혁명은 대부분 무력과 유혈충돌로 이루어졌다.
프랑스혁명 · 러시아혁명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다보니 피를 흘리지 아니한 혁명을 특별히 무혈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그 예이다.
요즘 들어 우리 고장에서는 느닷없이 ‘혁명’바람이 불고 있다.
제주도 당국이 올해를 ‘신경제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는 덕분이다.
“경제는 도민의 삶의 질과 서민의 행복을 결정짓는 절대적 요소이므로, 어려운 지역경제를『신 경제 혁명』을 통해 확실하게 풀어나간다”는 취지라고 한다.
이제 와서 굳이 용어를 가지고 시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주민이 주인인 지방자치시대에 주민을 위한 행정을 펴는 지자체가 하필이면 ‘두려움’과 ‘무서움’을 연상케 하는 적절치 못한 구호를 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아쉬움은 금할 수 없다.
주민들의 가슴에 와 닿게, 친절하고도 정겨운 ‘쓰임 말’이 얼마든지 있다.
그저 거창하게 선전이나 하려는 일과성 전시행정,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고압적인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는 잣대가 된다. 행정용어도 행정의 품격과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쉽고도 고운 말, 주민들에게 친근감을 주면서 강하게 호소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내고 이를 십분 활용하는 일도 민주행정이 해야 할 과제이다.
아무튼 난관에 처한 우리 경제가 조속히 회복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