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절망도 힘이 된다
[세평시평] 절망도 힘이 된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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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월(二月)의 신랑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신랑은 서설(瑞雪)처럼 하얀 턱시도로 터질 듯한 흥분을 애써 여미었고, 신부 역시 순백의 드레스로 봄날의 새순같은 순결을 감싸느라 했지만, 두 사람에게서 섬광처럼 뿜어져 나오는 사랑과 젊음의 ‘아우라’를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동 속에로 부화(孵化))하는 젊은 부부의 탄생을 지켜보는 시간은 행복했다. 그렇지만 내내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신랑 신부에게 보내는 축복의 간절함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한 남자의 고단했던 삶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부모석에서 의연함을 견지하려 애를 써보지만 연방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신랑의 아버지. 바로 내 죽마고우인 그 중년의 남자 때문이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이라 했던가. 처음 삶의 여정을 시작할 때 그는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천애고아(天涯孤兒)와 같았다.

 세습된 가난은 차치하고라도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버려, 그렇지 않아도 병약했던 그의 유년을 따뜻하게 품어 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것조차 기적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주린 배를 애써 감추며 병든 병아리처럼 교정의 언저리를 지척지척 배회해야 했고, 등록금을 못내 교무실로 불려갔다 돌아오는 그에게서는 자주 펑크난 타이어에서 나오는 신음과 같은 절망의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연히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그에게, ‘빛나는 졸업장’은 삶의 무기가 되기에는 턱없이 무력했다. 결국 ‘가방끈’을 놓아 버린 충년(沖年)의 그가, 사회라는 비정하고 황량한 벌판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붙든 생업의 끄나풀이 미장일이었다.

 시멘트를 물에 개고 숙련공 선배들의 ‘시다바리’를 도맡아 하면서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했고, 노동의 하루가 저물면 흥부네 집처럼 많은 형제들이 아수라장을 연출하는 남루한 방으로 돌아가 칼잠으로 고단한 하루를 뉘는 날이 끊없이 반복되었다.

 고단한 세월이 그렇게 속절없이 흐르고, 마침내 그는 홀로서기를 배웠다. 그리고 운명처럼 나타난 ‘똑순이’같이 야무진 동반자를 만났다.

 부부는 함께 미장일을 하며 단칸방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삶의 의미인 두 아들을 얻었다. 오늘 결혼하는 아들이 바로 그 시절에 얻은 첫 째 아들인 것이다. 가끔 내가 저녁 퇴근길에 소주병을 들고 친구의 집을 찾을 때면, 내외하느라 등 돌린 엄마의 젖을 빨던 그 젖비린내 물씬 풍기던 간난 아기인 것이다.

 삶에 대한 부부의 부단한 치열함은 잘 벼린 칼날이 되어, 마침내 그들을 보아뱀처럼 친친 감고 있던 가난의 질곡을 한 올 한 올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혼의 꿈을 심었던 단칸방 자리에는 그들의 피와 땀으로 설계한 양옥집이 넓게 자리를 잡았다.

 나이가 들어 미장일이 힘에 부쳐 새롭게 시작한 농사는 일취월장을 거듭한 결과, 이제 그는 연간 순수입이 1억원을 윗도는 부농(富農)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지만 부부는 오늘도 가난했던 그 날들과 꼭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결혼하는 장남과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둘째에게는 근사한 차까지 사주면서도, 정작 부부는 몸에 밴 근검절약으로 흙 묻은 작업복에 털털거리는 농사용차를 고집한다. 그리고 여느 회사원들처럼 농장을 직장 삼아,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농장으로 출퇴근한다.

 부부의 부지런이 이러할진데,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농작물이 어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의 결실을 보내주지 않으랴.

 해마다 첫 수확 때면 어김없이 부부의 농심(農心)이 담긴 하우스 밀감상자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 특별한 안주가 생기면 소주 한 잔 하자며 우정이 가득 담긴 안부를 보내오는 친구.

 결혼을 하고 나면 일본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날 장남과 간호사 며느리의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그는 오늘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저렇게 연신 땀을 훔치고 있을까.

 자랑스런 친구여! 행여라도 아들 부부 걱정일랑 붙들어 놓게나. 다른 집 아이가 아니라 자네의 아들이지 않는가. 불모의 땅에서 마침내 희망을 키워낸 자네 부부의 그 치열한 유전자가, 이미 심전(心田)에 무성히 뿌리를 내린 그런 ‘여망지고 대견한’ 아이가 아닌가. 그리고 심성까지 고운 그 아이가 선택한 효성 지극한 며느리가 아닌가.

 결혼식 마무리가 끝나는 대로 언제 날을 잡아 소주나 한 잔 하세. 자네와 새내기 부부의 자랑스러운 오늘에 우리의 우정을 담아, 손 높이 치켜들고 축배를 들고 싶네.   

고   권  일
수필가/삼성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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