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웃는 까닭
‘행복한 눈물’. 빨강머리 여자가 양손으로 두 뺨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웃는 그림. 만화 이미지를 확대한 회화(繪畵)다.
팝 아티스트(Pop artist)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1964년 작품이다.
2002년 11월 13일 뉴욕 그리스티 경매에서 한국의 한 갤러리 대표가 715만9500달러(당시 환율로 86억5000만원 상당)에 낙찰 받았다.
이 구입 자금이 ‘삼성그룹 미술품 비자금 의혹‘으로 불거졌고 최근 ’행복한 눈물‘은 이 덕(?)에 유명세를 타며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흔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행복한 눈물’은 그림의 문외한(門外漢)이 보기에도 묘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그림이다.
‘행복과 눈물‘이라는 상반될 것 같은 이미지를 한 장면에 농축시킨 표현력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기뻐도, 너무 행복해도 눈물은 나올 것이다. 감동과 감격의 눈물이다.
그러나 무엇이 저 여자에게 저렇게 ‘행복한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하는 의문은 ‘행복의 담론’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행복 보장 못하는 물질적 풍요
그렇다면 ‘인간의 영원한 꿈‘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오래도록 갈무리 할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영원한 숙제나 다름없다.
국어사전에는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행복의 전제 조건은 ‘욕구 충족’이며 행복의 심리상태는 ‘만족과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욕구 충족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행복론’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이 많다. 물질적 풍족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이론가들이다.
‘진보와 빈곤’의 저자로 알려진 미국의 사상가 ‘헨리 조지’는 그래서 ‘풍요속의 빈곤’을 현대사회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경제적 풍요에도 행복은 증진되기는커녕, 더 큰 욕구불만만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가난한 쿠바인들이 부자나라 미국인들보다 덜 불행하다”는 1970년대 경제학자 이스털린의 ‘행복지수 비교’는 그러기에 뜻하는 바가 크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
“돈이 곧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상식에 속한다.
이미 2300여년전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은 최고의 선이고 가치이지만 행복의 문제를 주관적 쾌락에서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행복의 조건은 물질이나 외부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뜻일 듯싶다.
그렇다고 경제성장이나 물질적 풍요를 막거나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중심의 따뜻한 경제 성장, 사람 냄새나는, 그리하여 서로 나누는 물질적 풍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과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에 있지 않고 넉넉하게 가꾸는 마음에 있다고 한다.
예수의 산상설교 ‘행복론’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운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일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모두가 물질과 욕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경제, 경제, 하며 경제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명박 새 정부의 경제 올인 정책이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짓밟아 버릴까 걱정돼서 하는 소리다.
화제의 그림, ‘행복한 눈물’은 분명 물질적 풍요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행복에서 나오는 눈물일 터이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