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사람 장일순은 평생을 ‘밑으로 기어라’를 생활철학으로 하여,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의인이다(최성현 엮음 ·『좁쌀 한 알 장일순』). 196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옥살이를 겪기도 했던 그는 정의로운 사람, 겸손과 섬김의 사람이었다.
천주교인이면서 해월(海月)최시형의 동학에 심취했는가 하면, 노장(老莊)사상의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지학순 주교와 절친했던 그는 개신교목사가 성당에서 설교를, 가톨릭신부가 교회에서 강론을 하게끔 주선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가 찾아와 “딸의 혼수비용을 기차 안에서 몽땅 털렸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곧바로 원주역으로 간 그는 역 부근의 노점상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흘 동안을 어울렸다. 아래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마침내 그 일대의 소매치기들을 알아냈고, 직접 돈을 훔친 자를 설득하여 쓰다 남은 돈을 받아냈다. 모자라는 액수는 자기 돈을 보태서 돌려주었다. 가정에서 설혹 부부간 다툼을 벌였더라도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는 철칙을 살아생전 지켰다. 실로 현자(賢者)이자, 작은 거인이었다. 이 장일순의 아호가 다름 아닌 일속자(一粟子) ‘조 한 알’이다.
우리 국토의 끝자락 전라남도 해남. 이곳 산골소년 오영석은 공부는 아주 잘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중학교엘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오군은 부모님과 농사를 도우며 나무를 하고 풀을 베었다. 너무나 학교에 가고 싶었던 순진한 이 소년은 편지를 썼다. “꼭 중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는 하소연이었다. 교회를 다녔던 그는 지체 없이 겉봉에 ‘하나님 전상서’라 적고 우체통에 넣었다. 돈이 없어서 우표도 붙이지 못하였다.
이 편지를 발견하고 고심하던 집배원은 어느 한 교회의 목사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엉뚱하게 하나님 앞으로 가는 편지의 수신자가 된 사람은 당시 해남에서 신망이 높았던 해남읍내 교회 이준묵 목사(1911~2000)였다.
이 목사의 집에서 성장한 시골 어린이 오영석은 훗날 한신대학교 총장이 된다(한겨레신문 · 2007. 3. 21). 이런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어찌 잊을 것인가. 그는 목사와 교수 · 총장으로서, 소년시절의 역경을 회상하며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
평생을 모군(母軍)을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있다. 해병대 예비역장교인 정채호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저술한 해병대 관련 서적만도 20여권에 달한다.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빈한한 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해병대에만 매달리는’ 영원한 해병이다. 해병대의 역사나 저서 · 자료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군복무 시에 익힌 투철한 애국심과 해병대에 대한 열정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는 제주도출신 해병들을 사랑하는 ‘탐라 해병송(海兵頌)’이라는 시(詩)도 지었다.
‘이 땅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거도적으로 입영했던 삼천 명의 해병들/비길 데 없이 충성스러웠던 탐라건아들의 기백/그대들이 세운 불멸의 공훈은 별처럼 찬연히 빛나도다’(해병대 3 · 4기전우회편찬 · 『참전실록』). 흔히들 해병대를 가리켜 결집력이 막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병대의 전통과 특성을 과시하려한다 해도, 이를 계속 기리고 전승할 수 있도록 희생하는 정채호와 같은 인물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사라질 지언 정 결코 죽지 않는 노병’으로 칭찬받아 마땅할 터이다.
낮은 데로 향하면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준 좁쌀 한 알의 장일순, 불타는 향학열과 확고한 믿음으로 신(神)께 편지를 썼던 우직한 촌사람 오영석, 일생을 모군발전에 헌신 봉사하는 해병사랑의 화신 정채호. 2008년 새해에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 용 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