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똥 꽃
[세평시평] 똥 꽃
  • 제주타임스
  • 승인 200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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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영근 노란 감귤들을 다 따내자, 그 동안 축 늘어졌던 나뭇가지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위로 튀어 올랐다. 흠칫 놀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하마터면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다. 잠시 물러나 앉아 가슴을 진정하고, 빼곡히 매달고 있던 감귤들을 다 내려놓아 한 시름 놓은 감귤나무들을 찬찬이 올려다보았다. 자식 같은 열매들을 봄부터 가을까지 보듬고 건사하느라 수액(樹液)의 진까지 다 빼는 바람에, 병동의 환자처럼 파리한 수피(樹皮)와 시들시들한 잎사귀들, 거뭇거뭇 앙상한 가지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가을 가뭄까지 타고 있는, 수척하여 더욱 안쓰러운 나무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 동안 힘들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가을의 끝물에 이르도록 풍작의 감귤열매들 무게로 시난고난했을 그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해마다 우리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주는 고마운 나무들. 일손을 빌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수확해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었으련만, 점점 일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아내 혼자 아등바등 감귤따기에 매달려 보았지만, 눈 앞에 닥친 겨울 기운 속에 나무들은 탈진 직전이다.

언제 날을 잡아 영양제를 뿌려 주고 듬뿍 물을 뿌려, 잃어버린 기력을 되찾아 주어야 하겠다. 내년 봄 하얀 감귤 꽃을 피울 때까지 만이라도, 모처럼 휴면의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고   권   일
수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처럼 손으로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가만가만 매만져 주자, 비로소 나무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 가시는 어머니가, 가끔 무정한 세월에 건네던 광목빛 쓸쓸한 미소처럼.

세상의 어머니가 대개 그렇지만, 내 어머니의 삶은 당신 자식들에게 바친 희생이었다. 배 아파 낳은 네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일찌감치 당신 자신의 안일은 포기하신지 오래 되었다. 대신 농토와 바다를 헤집어 삶의 뿌리를 캐는 농부와 해녀로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이제 팔순을 앞둔 지금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인고의 상처인 고질적인 관절염, 그리고 세상 소리와 단절된 청각장애뿐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장성한 자식들에게 더 챙겨 주지 못해 애면글면하신다.

평생 당신의 피땀으로 일구신 집과 농장 아낌없이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시고도 무엇이 부족하신지, 자식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기 위해 신 새벽부터 앞장 서신다. 무릎이 쑤셔 쪼그려 앉기조차 힘들어 하시면서도 땅바닥을 기면서 잡초를 뽑으시고, 며느리의 농약살포 때는 행여 줄이 나무에 걸릴까 나무 사이를 오가며, 꼬인 줄을 풀어 바로 잡아 주신다.

나 자신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모시고 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비록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못하더라도, 몸과 마음을 바쳐 어머니의 노후를 곁에서 보살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노인네가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들어앉으면 짐이 된다며 끝내 손사래를 치시며 딴 살림을 고집하시더니, 이제 내 아이들이 집을 떠나 여유가 있는데도, 대대로 살아오신 당신의 집에서 나오시지를 않는다.

당신 마음대로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어 며느리 눈치 보지 않아 편하다고 하시지만, 말씀과 달리 어머니의 잠자리와 식생활은 민망할 정도로 열악하다.

전기료를 절약한다고 안방에 설치해 드린 에어컨은 한여름에도 가동되는 일이 거의 없고, 보일러 대신 전기장판으로 견뎌내는 겨울 방안은 들어설 때마다 냉기가 훅 끼쳐온다. 그뿐 아니라 아내가 때맞춰 채워드린다고 하지만, 어머니의 냉장고 안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자식들의 간절한 치사랑은 끝내 마다하시며, 내리사랑으로 일관하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속수무책인 아들은 불효막심에 오늘도 가슴이 아려온다.

낳아주신 부모님 봉양을 벗어 던지고 싶은 ‘짐’처럼 여긴다는 참담한 야만(野巒)의 시대. 요즘 들어 혹시 나도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창졸지간에 어머니를 떠나보내지나 않을까 부쩍 조바심이 인다.

전라북도 덕유산 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며, 치매에 걸려 대소변 못 가리는 어머니지만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전 희식’씨의 글을 눈시울 붉혀 읽으며, 가없는 세상 어머니들의 은혜에 목이 메어 온다. 만수무강하세요. 우리 어머니들!

똥 꽃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방 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 꽃이 활짝 피었네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걸음 검노란 똥 자국들

내 어머니 신산(辛酸)했던 세월

방바닥 여기저기에, 이불 두 채에 고스란히 담겼네

우리 어릴 적 봄날은 보리밭 밀밭 마늘밭

구릿한 수황 냄새로 풍겨났지

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 때처럼

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

진달래꽃 몇 잎 따다

깔아 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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