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너는 오른 쪽이지?” “아버지는 왼쪽입니까?” “너무 오른 쪽으로 가는 것 아니냐?” “아버지는 너무 심하게 왼쪽 아닙니까?” “과거에는 서울대생 거의가 자신이 앞장서서 진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했는데..........” “지금은 이념 논쟁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경쟁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퇴행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우리는 열정을 경영하기 위하여 밤새워 정보의 바다를 여행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논쟁을 계속하다가 풀이 죽고 만다.
하긴 그렇다. 자신의 이념성향을 ‘보수’라고 생각하는 서울대생들이 많다는, 최근 언론보도까지 있었다. 서울지역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 조사 결과, 그중 서울대생 응답자의 40.5%가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수적’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서울대생의 보수 성향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자신의 성향에 대해 ‘진보적’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보수적’이라고 응답한 학생보다 적게 나온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또 있다. 진보주의에 앞장서 온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진보’의 위기론은 더욱 학산 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 ‘자본론’의 한국판 최초 완역자이자, 국내에서 마르크스경제학으로 외국 대학 박사학위를 받은 유일한 학자다. 어떤 이는 그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다.〈자본론〉이 금서인 시절 그가 서울대에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학원 재학생의 50% 이상을 차지했던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대는 퇴임을 앞둔 김 교수의 후임으로 마르크스경제학이 아닌 ‘경제학일반’으로 채용자격을 결정했다. 마르크스경제학으로 특정할 경우 우수 교수를 영입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나를 끝으로 서울대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이란 과목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나아가 ‘종언’을 이야기하는 시대.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였던 적은 없다고 단언한다. 평생 마르크스를 읽고, 연구하고, 가르쳐온 그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급격한 쇠퇴는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의 쇠퇴가 아니라, 학문적 유행에 민감하게 처신하며 마르크스주의를 폐기처분한 지식인들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한국의 우파는 진정한 우파가 아니다. 우파라면 반미 민족주의가 있어야 하는데, 민족주의도 없고 반미는커녕 친미조차 제대로 못 따라가는 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 같은 강대국들이 실제로 국제사회에서 저질러 온 죄악에 비한다면 북한은 그냥 가난한 나라, 좀 주체적으로 ‘깡폼’을 잡는 나라에 불과했을 것이다. 북한이 나쁜 짓을 했다면 얼마나 나쁜 짓을 했겠는가?” ‘일본의 양심’ 구로즈미 마코토(黑住眞) 도쿄대 교수가 최근 도올 김용옥과 대화를 나누면서 던진 말이다. 그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이후의 일본사상사 연구에 일가를 이룬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반가운 소식도 있다. 그동안 내부 단절이 심했던 한국 철학계의 진보·보수 학자들이 모여 지난 11월 30일 철학계 현안을 토론했다. 이념 갈등의 골도 깊어지면서 철학도 서로 함께 모여 논의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과거 철학계는 서로 나뉘어 남의 회의에는 가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활동해왔다. 이번 ‘한국철학 대토론회’가 철학계 분열상을 짚는 기회가 되었다니 희망이 보인다.
그렇다면 진보 진영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일까. 그동안 진보 담론은 자본주의 비판을 핵으로 하여 진화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진보 담론과 진보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예전 같지 않으며, 그 비판세력 역시 만만치 않게 성장했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보·혁 갈등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들은 보수와 진보 진영의 갈등을 대결로까지 부추기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단지 이념의 차이이고, 어느 쪽이 옳으냐는 판단할 수 없다. 진보는 외골수로 나가기 쉽고, 보수는 굳어져버리기 쉽다. 진보와 보수는 대립하지 않고 그저 대화할 뿐이다.
우리 세대는 청년시절,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아니면 「창작과 비평」이나 「실천문학」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아들 세대는 ‘이데올로기 종언(終焉)’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